백두산 종주 등반기 2003년 8월1-6일 [5박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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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종주 등반기
작성자 : 강운수
작성일 : 2003/08/21 11:26 (2003/08/21 13:02)
조회수 : 187
동명정보공고 교사 강 운 수
산정산악회에서 백두산종주산행이 8월 1일부터 있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기로 작정하였다. 작년 금강산 여행을 할 때 속초에서 러시아로 돌아 백두산을 가는 코스가 있다는 말을 듣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막상 스스로 여행일정을 짠다는 것은 어려워 망설이고 있던 차에 쉽게 여정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 속에 살아오면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백두산과 연변, 용정 일대이다. 민족의 얼이 살아 숨쉬고 있는 두만강 건너 편, 일제치하를 피하여 고향산천을 버리고 살아있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떠나가 살던 땅,
내 평생에 가장 가고 싶은 곳,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산정산악회 회원 24명, 동명공고 교직원 3명, 나의 아내와 김삼희 교사의 차남 도균이, 이렇게 5명이 합류하여 모두 29명이 일행이었다.
드디어 8월 1일 오전 5시에 시민회관에서 출발하여 속초로 향하였다. 부산에서 마산으로 안동을 경유하여 대관령부근으로 오니 서울서 연휴를 동해안에서 보내려고 오는 차량들이 길을 메우고 있었다. 배 시간을 놓칠까 조마조마하며
속초에 도착하니 우리를 태우고 갈 동춘호가 대기하고 있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각처에서 몰려온 여행객들로 대합실은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 나이가 들고 머리가 희끗 희끗한 분 들 이었다.
승선하여 자리를 잡은 후 여자분들은 한방을 따로 정하고 10여명이 한방에 모여 인사를 나누었다. 오후 4시 30분 출발하여 내일 아침 9시 경에 러시아의 자루비노 항구에 도착이었다. 자루비노 항구는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울라디보스토크항구보다 남쪽에 있는 군사 요충지다. 북한의 나진, 선봉보다는 북쪽에 있는 러시아의 최남단 항구다. 배가 출항하자 갑판 위에서 감격에 젖은 여행객들은 소주잔을 나누면서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모습들이었다.
다음날 배가 도착하자 우리를 태우고 갈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군인들이 여권을 검사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 지루하기 말할 수 없었다. 도대체 러시아인들은 바쁜 것이 없구나? 2시간을 기다리면서 땅과 자원이 풍부한데도
못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드디어 버스에 타고 중국의 장영자 세관을 향하여 가면서 푸른 초원을 바라보며 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 땅은 연해주라고 하여 우리민족이 일제 시대에 국경을 넘어 살아가던 땅이 아니던가?
1930년 대 어느 날 스타린의 이주정책에 의하여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고 기차에 태워져 가도 가고 끝없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정처없이 가다가 이름도 모르는 벌판에 내려 놓고 기차는 떠나가고 말았으니
그들은 살기 위하여 씨를 뿌리고 판자집을 지어 살아가기 시작하였으니 이름하여 오늘 날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이 아니던가?
집단농장 '꼴호즈'......... 끝없이 펼쳐진 목화밭. 하얀 눈이 뿌린 듯한 솜덩어리는 우리 민족의 한이 서린 고난과 눈물이었다.
2시간쯤 지나니 중국의 국경을 통과하였고 훈춘에 도착하였다.
시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 연변 교포인 듯한 여인들이 옥수수, 도너츠,고구마 등을 들고 무조건 1.000원에 사라고 하였다. 연변일대에는 한국돈이 바로 통용되어 편리한 점도 있었다. 처음 만나는 동족이라는 마음에 이것저것 사고
보니 다 먹을 수도 없었다. 조선족 가이드가 인사를 하여 정말 중국 땅에 발을 디뎠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곧 바로 훈춘 시내에 들러 점심식사를 하니 모두가 우리 동족이었다. 저들의 부모와 조부님들이 이 땅에 흘러 들어와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후손들이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장, 너무도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훈춘을 지나 백두산이 있는 이도백하까지는 6시간이 소요되는 데 두만강을 왼편에 보면서 간다고 하여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지나니 연길이라고 하는 이정표가 보여 가이드에 물어보니 연변 안에 연길시가 있었다. 우리 민족이 간도로 이주해 온 이후 현재 연길에는 5새대 까지 이어지고 있다. 연변 자치주에서는 조선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모든 간판은 한글과 한자의 병용이었다. 연길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일제시대 항일운동의 본거지로서 최초의 무장항일 운동이었던 봉오등 전투와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의 청산리 전투의 격전지가 있으며 안중근 의사 등 수많은
의사, 열사가 활약하던 곳으로 연길 현지인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간도는 연길을 중심으로 한 연변 자치주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간판이 한자와 한글이 이중으로 되어 타국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다만 타임 머쉰을 타고 2-30년 전으로 돌아간 우리 나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다시 차창을 바라보면서 갖가지 회포에 젖어 있노라니 두만강이 나타났다. 내가 알기로는 두만강을 도강하여 국경을 넘어 오는 이북동포들이 많다고
하여 아주 좁은 강인 줄 생각하였으나 우기철이라 그런 지 강물이 시퍼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가이드는 계속하여 민족의 슬픈 이야기들을 신이 나서 들려주고 있었다. 파란색 건물을 가르키며 저 곳은 도강을 하여 넘어온 동포들을
집단으로 수용하였다가 돌려 보내는 집이라고 하기에 가슴이 아팠다. 숙소가 있는 이도백하에 도착, 미인송의 고향인 듯 소나무들이 쭉쭉 미인인양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1시에 기상하여 버스로 산행의 기점으로
향하였다. 차로 오르는 동안 백두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가지가지색의 꽃들은 우리일행을 반겼다. 도로공사로 중간에 내려 다시 차로 갈아타니 정상을 향하여 비호처럼 달려가는 것이었다. 돌계단 밑에서 내리니 날씨가 너무 추웠다.
돌계단을 20분쯤 오르노라니 천지의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짙푸른 동해바다의 모습처럼 광활하게 펼쳐진 천지여! 보고 싶어서 그리워서 찾아온 내 나라 땅 백두산 천지는 그렇게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백두산 천지는 반으로 갈라
북한과 중국이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비석을 보니 한쪽은 중국령이고 한 쪽은 조선령이라는 경계비를 보니 착잡한 감정을 씻기가 어려웠다. 휴전선만 없다면 개성, 평양, 개마고원을 거쳐 온다면 몇 시간이면 올 길을 이틀이 걸려 돌아
돌아 왔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냐? 백두산에서 천지를 한 번 번쩍 들고 말리라 라고 다짐하였기에 천지를 두좌법으로 물구나무 서기를 하고 기념 찰영을 하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였다. 산행의 행로는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들을 차례로 오르내리는 코스이었는데 청석봉에서 백운봉으로 가는 길은 마치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연상시킬만큼 협곡의 깊이가 깊고 웅장했다. 백두산은 년 중 맑은 날이 며칠 되지 않아 평생에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이
아니면 볼 수 없다고 가이드가 겁을 하도 주기에 걱정이 되지 않는 바도 아니었으나 막상 구름 한 점 없는 천지를 한 번 만에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이 있는 것은 평소 살아온 길이 잘못 되지는 않았는가 보다. 작년에 금강산을 보았으나
전체를 볼 수 없어 아쉬운 점이 많았으나 백두산의 진면목을 한 눈에 조망하노라니 나의 조그만 존재가 너무도 보잘것없어 조물주의 위대한 경이로움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산의 정상에 거대한 못이 형성
되었는가? 여기가 우리민족의 정기가 발원된 터전이란 말인가? 너무도 아름다운 산의 정취는 감격에 겨워 가슴속에 젖어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정상 부근에는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강하여 강 길태 님의 모자를 천지에 날려
버리고 말았다. 내려오는 길목의 장백 폭포의 신비로운 모습은 전설 속의 동화의 나라에서만 존재하는 이국의 풍경이었다.
다음날은 저항시인 윤 동주님의 대성중학교로 가는 길목에서 등반대장이 시인 윤동주에 대하여 일행 중에 설명할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나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나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준 책 한 권만을 들라면 나는 윤 동주님
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서슴치 않고 추천 할 것이다. 그는 용정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연희 전문학교 영문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동지사 대학 영문과에 편입하여 재학하였고 졸업 직전 고향에 이불과 책을 부친 후
시모노세끼 항구에서 배를 타다가 형사에게 이끌려 후꾸오까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친척인 송 몽규가 면회를 가니 나는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고 전하였고 형무소 소장의 증언은 동주 선생은 마지막 큰 비명을 지르고 죽어갔다고
했다. 그 이름 모를 주사는 일본학생에 의하여 서울대학교 졸업논문에서 식염수(소금물)이라고 밝혀졌다.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하던 일본은 부상당해오는 병사들에게 수술 후 모자라는 피를 보충 할 수 없어 의사들에 의해 실험 대상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의사들은 소금물이 몸 속에서 피 대신에 융해되지 않을까를 실험하면서 일본으로 볼 때는 사상범에 속하는 시인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서시, 별 혜는 밤, 참회록, 해방 후 윤 동주 님의 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빠지지 않고 수록되어 청소년들에게 신념과 의지를 불어 넣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가이드가 선구자를 부르자고 제안을 해왔고 등반대장이 나에게 마이크를 주면서 강 선생님이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기에
선구자를 부르니 기분이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가이드가 오른편에 보이는 산이 바로 김좌진 장군이 일본군과 싸운 청산리라고 설명하면서 봉오동전투의 홍범도 장군의 유적지도 근처라고 하여 이 근처에 모든 것이 밀집
되어 있구나? 하는 중에 운전 기사님이 작년에 김 두한의 딸 김 을동이 한국의 대학생을 인솔하여 김좌진의 유적지와 독립군의 유적지를 답사해 나가는 데 마침 이 차에 탔다고 하여 이야기의 꽃이 무르익어 갔다. 야인시대는 연변에서
가장 인기 있어 가이드도 좋아하는 프로라고 하였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일송정이 보이는 길가에 정차하고 멀리서 나마 비암산을 눈안에 담고 당시를 회상해 보았다. 다시 차는 용정 시내로 들어가니 해란강이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었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드디어 차는 대성중학교에 도착하여 서시가
새겨진 시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니 참으로 만가지 회포가 엄습해 오는 것이었다. 나의 지난날 가난과 학업문제로 힘들었을 때 시인 윤 동주의 싯구들은 나에게 미래에 대한 용기와 사명감을 주지 않았던가? 2층으로 안내되어 올라가니
알만한 애국지사들의 사진들이 있었고 설명을 들었다. 방명록에 기록을 하고 적은 돈이나마 기부를 하고 보니 행복한 마음에 젖어드는 것이었다. 우리민족은 애국자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형편되는 데로 얼마간의 장학금을 내는 것을 보면 동포애란 참으로 뜨거운 것이 아니던가?
점심은 고려식당, 정해진 식사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 불고기 2접시와 냉면을 시
켜먹으니, 불고기 한 접시에 3,000이고 냉면 한 그릇에 1,000원이라 오래만에 포식을 실컷할 수 있었다. 오후엔 북한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도문
시에 도착, 북한땅을 바라보니 민족의 안타까운 비극이 형언할 수 없이 가슴아파왔다. 도문은 불화통하와 송화강 등 여러 갈래의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란 뜻으로, 도문시는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의 남양시가 보이는 곳이다. 지구상에
마음대로 갈 수 없는 땅, 돌아서 돌아서 이렇게 멀리 찾아왔단 말이냐? 강 한가운데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다리의 한가운데를 갈라 국경의 경계선으로 중국 쪽은 빨간색, 북한 쪽은 파란색으로 칠하여 국경선을 구분하고 있었다. 다리의
반 이상은 넘어갈 수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강물은 막힘없이 흐르는데 나의 발길은 여기에서 멈추어야만 하는가? 말없이 북녘 땅을 바라보며 하나 되는 그날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거워만 갔다. 인위적인 이런
차단은 백의 민족은 원하지 않았다. 너희들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 모여 3.8선을 가르고 두만강의 다리를 반쪽으로 갈라놓았구나? 이 땅에서 살다간 영령
들이 얼마나 통곡하고 있는지 아는가? 모르는가? 안 창호, 김 구, 윤 봉길,
이 봉창, 이 육사 등, 저 애국지사들의 통곡의 눈물을 왜 듣지 못하는가?
다음날은 연변지역을 직접 보는 느낌은 예상과는 다르게 친근했다. 자전거, 인력거, 택시, 초라한 집들, 거리의 풍경이 우리 어릴 때의 생활 모습을 연상하게 했고, 내 마음도 어느새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돌아오는 코스는 비교적
올 때보다는 수월하였다. 동해바다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장엄한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금강산쯤으로 짐작되는 비내리는 동해바다에서 돌고래의 향연을 볼 수 있는 행운을 가진 것은 나에겐 행운이었다.
※5박 6일의 짧은 일정이라 아쉬운 점이 많았으나 빈틈없는 일정을 차질없이 안내해준 산정산악회 등반대장 김 홍수님과 총무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from 61.82.223.111
산정인 지난 백두산 일정에 강 선생님과 함께 하게 되어 즐거웠습니다.여행 일정 동안선생님의 다방면의 해박하신 지성과 동료를 배려하시는 따듯한 마음은 함께한 많은 분들은 오래또록 기억할것입니다.함께하신 김 선생님 강 선생님 사모님 모두 안녕하시겠죠?9월의 산정의 산행에 자주 참여하셨으 많은 가르침을 주시길 희망합니다.뵐날을 기다리며....... 2003/08/21
저니 강선생님 백두산종주 등반기 잘 읽었습니다...구름한점없는 천지..안타까움에 바라본 북녘땅...역사의 현장을 두루두루 살펴보시고 꼼꼼하게 챙겨주신 덕분에 ...좋은 공부되었습니다... 가족과 함께한 백두산... 아마..도균군에게도 좋은경험이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2003/08/21
걸어서 하늘까지 선생님 덕택에 산정님들 백두산 잘 다녀오셔네요^^ 가지 못한 분들도 이글을 읽고 백두산과 그주위의 환경이 눈에 아른 거리며^^ 조은후기 감사합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늘 건강하시고 조은 시간 되십시요^^ 2003/08/21
박사 우리나라 조상님들의 얼을 다시한번 답사형식으로서...아!! 만주벌판 넓고깊은 산자락마다 우리민족의 애환이 서려 있고 역사의 숨결이 베어 있는 그곳을 감격스럽게 사실적으로 담담히 기록하구 써주신 '백두산 종주기'에서 소인놈 많이 배우고 갑니다.....강선생님!! 산정인을 위한 따스한 맘씨!!정말 고맙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꾸벅~ 2003/08/22
작성자 : 강운수
작성일 : 2003/08/21 11:26 (2003/08/21 13:02)
조회수 : 187
동명정보공고 교사 강 운 수
산정산악회에서 백두산종주산행이 8월 1일부터 있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기로 작정하였다. 작년 금강산 여행을 할 때 속초에서 러시아로 돌아 백두산을 가는 코스가 있다는 말을 듣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막상 스스로 여행일정을 짠다는 것은 어려워 망설이고 있던 차에 쉽게 여정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 속에 살아오면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백두산과 연변, 용정 일대이다. 민족의 얼이 살아 숨쉬고 있는 두만강 건너 편, 일제치하를 피하여 고향산천을 버리고 살아있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떠나가 살던 땅,
내 평생에 가장 가고 싶은 곳,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산정산악회 회원 24명, 동명공고 교직원 3명, 나의 아내와 김삼희 교사의 차남 도균이, 이렇게 5명이 합류하여 모두 29명이 일행이었다.
드디어 8월 1일 오전 5시에 시민회관에서 출발하여 속초로 향하였다. 부산에서 마산으로 안동을 경유하여 대관령부근으로 오니 서울서 연휴를 동해안에서 보내려고 오는 차량들이 길을 메우고 있었다. 배 시간을 놓칠까 조마조마하며
속초에 도착하니 우리를 태우고 갈 동춘호가 대기하고 있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각처에서 몰려온 여행객들로 대합실은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 나이가 들고 머리가 희끗 희끗한 분 들 이었다.
승선하여 자리를 잡은 후 여자분들은 한방을 따로 정하고 10여명이 한방에 모여 인사를 나누었다. 오후 4시 30분 출발하여 내일 아침 9시 경에 러시아의 자루비노 항구에 도착이었다. 자루비노 항구는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울라디보스토크항구보다 남쪽에 있는 군사 요충지다. 북한의 나진, 선봉보다는 북쪽에 있는 러시아의 최남단 항구다. 배가 출항하자 갑판 위에서 감격에 젖은 여행객들은 소주잔을 나누면서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모습들이었다.
다음날 배가 도착하자 우리를 태우고 갈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군인들이 여권을 검사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 지루하기 말할 수 없었다. 도대체 러시아인들은 바쁜 것이 없구나? 2시간을 기다리면서 땅과 자원이 풍부한데도
못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드디어 버스에 타고 중국의 장영자 세관을 향하여 가면서 푸른 초원을 바라보며 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 땅은 연해주라고 하여 우리민족이 일제 시대에 국경을 넘어 살아가던 땅이 아니던가?
1930년 대 어느 날 스타린의 이주정책에 의하여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고 기차에 태워져 가도 가고 끝없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정처없이 가다가 이름도 모르는 벌판에 내려 놓고 기차는 떠나가고 말았으니
그들은 살기 위하여 씨를 뿌리고 판자집을 지어 살아가기 시작하였으니 이름하여 오늘 날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이 아니던가?
집단농장 '꼴호즈'......... 끝없이 펼쳐진 목화밭. 하얀 눈이 뿌린 듯한 솜덩어리는 우리 민족의 한이 서린 고난과 눈물이었다.
2시간쯤 지나니 중국의 국경을 통과하였고 훈춘에 도착하였다.
시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 연변 교포인 듯한 여인들이 옥수수, 도너츠,고구마 등을 들고 무조건 1.000원에 사라고 하였다. 연변일대에는 한국돈이 바로 통용되어 편리한 점도 있었다. 처음 만나는 동족이라는 마음에 이것저것 사고
보니 다 먹을 수도 없었다. 조선족 가이드가 인사를 하여 정말 중국 땅에 발을 디뎠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곧 바로 훈춘 시내에 들러 점심식사를 하니 모두가 우리 동족이었다. 저들의 부모와 조부님들이 이 땅에 흘러 들어와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후손들이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장, 너무도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훈춘을 지나 백두산이 있는 이도백하까지는 6시간이 소요되는 데 두만강을 왼편에 보면서 간다고 하여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지나니 연길이라고 하는 이정표가 보여 가이드에 물어보니 연변 안에 연길시가 있었다. 우리 민족이 간도로 이주해 온 이후 현재 연길에는 5새대 까지 이어지고 있다. 연변 자치주에서는 조선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모든 간판은 한글과 한자의 병용이었다. 연길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일제시대 항일운동의 본거지로서 최초의 무장항일 운동이었던 봉오등 전투와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의 청산리 전투의 격전지가 있으며 안중근 의사 등 수많은
의사, 열사가 활약하던 곳으로 연길 현지인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간도는 연길을 중심으로 한 연변 자치주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간판이 한자와 한글이 이중으로 되어 타국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다만 타임 머쉰을 타고 2-30년 전으로 돌아간 우리 나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다시 차창을 바라보면서 갖가지 회포에 젖어 있노라니 두만강이 나타났다. 내가 알기로는 두만강을 도강하여 국경을 넘어 오는 이북동포들이 많다고
하여 아주 좁은 강인 줄 생각하였으나 우기철이라 그런 지 강물이 시퍼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가이드는 계속하여 민족의 슬픈 이야기들을 신이 나서 들려주고 있었다. 파란색 건물을 가르키며 저 곳은 도강을 하여 넘어온 동포들을
집단으로 수용하였다가 돌려 보내는 집이라고 하기에 가슴이 아팠다. 숙소가 있는 이도백하에 도착, 미인송의 고향인 듯 소나무들이 쭉쭉 미인인양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1시에 기상하여 버스로 산행의 기점으로
향하였다. 차로 오르는 동안 백두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가지가지색의 꽃들은 우리일행을 반겼다. 도로공사로 중간에 내려 다시 차로 갈아타니 정상을 향하여 비호처럼 달려가는 것이었다. 돌계단 밑에서 내리니 날씨가 너무 추웠다.
돌계단을 20분쯤 오르노라니 천지의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짙푸른 동해바다의 모습처럼 광활하게 펼쳐진 천지여! 보고 싶어서 그리워서 찾아온 내 나라 땅 백두산 천지는 그렇게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백두산 천지는 반으로 갈라
북한과 중국이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비석을 보니 한쪽은 중국령이고 한 쪽은 조선령이라는 경계비를 보니 착잡한 감정을 씻기가 어려웠다. 휴전선만 없다면 개성, 평양, 개마고원을 거쳐 온다면 몇 시간이면 올 길을 이틀이 걸려 돌아
돌아 왔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냐? 백두산에서 천지를 한 번 번쩍 들고 말리라 라고 다짐하였기에 천지를 두좌법으로 물구나무 서기를 하고 기념 찰영을 하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였다. 산행의 행로는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들을 차례로 오르내리는 코스이었는데 청석봉에서 백운봉으로 가는 길은 마치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연상시킬만큼 협곡의 깊이가 깊고 웅장했다. 백두산은 년 중 맑은 날이 며칠 되지 않아 평생에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이
아니면 볼 수 없다고 가이드가 겁을 하도 주기에 걱정이 되지 않는 바도 아니었으나 막상 구름 한 점 없는 천지를 한 번 만에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이 있는 것은 평소 살아온 길이 잘못 되지는 않았는가 보다. 작년에 금강산을 보았으나
전체를 볼 수 없어 아쉬운 점이 많았으나 백두산의 진면목을 한 눈에 조망하노라니 나의 조그만 존재가 너무도 보잘것없어 조물주의 위대한 경이로움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산의 정상에 거대한 못이 형성
되었는가? 여기가 우리민족의 정기가 발원된 터전이란 말인가? 너무도 아름다운 산의 정취는 감격에 겨워 가슴속에 젖어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정상 부근에는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강하여 강 길태 님의 모자를 천지에 날려
버리고 말았다. 내려오는 길목의 장백 폭포의 신비로운 모습은 전설 속의 동화의 나라에서만 존재하는 이국의 풍경이었다.
다음날은 저항시인 윤 동주님의 대성중학교로 가는 길목에서 등반대장이 시인 윤동주에 대하여 일행 중에 설명할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나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나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준 책 한 권만을 들라면 나는 윤 동주님
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서슴치 않고 추천 할 것이다. 그는 용정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연희 전문학교 영문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동지사 대학 영문과에 편입하여 재학하였고 졸업 직전 고향에 이불과 책을 부친 후
시모노세끼 항구에서 배를 타다가 형사에게 이끌려 후꾸오까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친척인 송 몽규가 면회를 가니 나는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고 전하였고 형무소 소장의 증언은 동주 선생은 마지막 큰 비명을 지르고 죽어갔다고
했다. 그 이름 모를 주사는 일본학생에 의하여 서울대학교 졸업논문에서 식염수(소금물)이라고 밝혀졌다.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하던 일본은 부상당해오는 병사들에게 수술 후 모자라는 피를 보충 할 수 없어 의사들에 의해 실험 대상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의사들은 소금물이 몸 속에서 피 대신에 융해되지 않을까를 실험하면서 일본으로 볼 때는 사상범에 속하는 시인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서시, 별 혜는 밤, 참회록, 해방 후 윤 동주 님의 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빠지지 않고 수록되어 청소년들에게 신념과 의지를 불어 넣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가이드가 선구자를 부르자고 제안을 해왔고 등반대장이 나에게 마이크를 주면서 강 선생님이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기에
선구자를 부르니 기분이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가이드가 오른편에 보이는 산이 바로 김좌진 장군이 일본군과 싸운 청산리라고 설명하면서 봉오동전투의 홍범도 장군의 유적지도 근처라고 하여 이 근처에 모든 것이 밀집
되어 있구나? 하는 중에 운전 기사님이 작년에 김 두한의 딸 김 을동이 한국의 대학생을 인솔하여 김좌진의 유적지와 독립군의 유적지를 답사해 나가는 데 마침 이 차에 탔다고 하여 이야기의 꽃이 무르익어 갔다. 야인시대는 연변에서
가장 인기 있어 가이드도 좋아하는 프로라고 하였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일송정이 보이는 길가에 정차하고 멀리서 나마 비암산을 눈안에 담고 당시를 회상해 보았다. 다시 차는 용정 시내로 들어가니 해란강이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었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드디어 차는 대성중학교에 도착하여 서시가
새겨진 시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니 참으로 만가지 회포가 엄습해 오는 것이었다. 나의 지난날 가난과 학업문제로 힘들었을 때 시인 윤 동주의 싯구들은 나에게 미래에 대한 용기와 사명감을 주지 않았던가? 2층으로 안내되어 올라가니
알만한 애국지사들의 사진들이 있었고 설명을 들었다. 방명록에 기록을 하고 적은 돈이나마 기부를 하고 보니 행복한 마음에 젖어드는 것이었다. 우리민족은 애국자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형편되는 데로 얼마간의 장학금을 내는 것을 보면 동포애란 참으로 뜨거운 것이 아니던가?
점심은 고려식당, 정해진 식사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 불고기 2접시와 냉면을 시
켜먹으니, 불고기 한 접시에 3,000이고 냉면 한 그릇에 1,000원이라 오래만에 포식을 실컷할 수 있었다. 오후엔 북한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도문
시에 도착, 북한땅을 바라보니 민족의 안타까운 비극이 형언할 수 없이 가슴아파왔다. 도문은 불화통하와 송화강 등 여러 갈래의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란 뜻으로, 도문시는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의 남양시가 보이는 곳이다. 지구상에
마음대로 갈 수 없는 땅, 돌아서 돌아서 이렇게 멀리 찾아왔단 말이냐? 강 한가운데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다리의 한가운데를 갈라 국경의 경계선으로 중국 쪽은 빨간색, 북한 쪽은 파란색으로 칠하여 국경선을 구분하고 있었다. 다리의
반 이상은 넘어갈 수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강물은 막힘없이 흐르는데 나의 발길은 여기에서 멈추어야만 하는가? 말없이 북녘 땅을 바라보며 하나 되는 그날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거워만 갔다. 인위적인 이런
차단은 백의 민족은 원하지 않았다. 너희들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 모여 3.8선을 가르고 두만강의 다리를 반쪽으로 갈라놓았구나? 이 땅에서 살다간 영령
들이 얼마나 통곡하고 있는지 아는가? 모르는가? 안 창호, 김 구, 윤 봉길,
이 봉창, 이 육사 등, 저 애국지사들의 통곡의 눈물을 왜 듣지 못하는가?
다음날은 연변지역을 직접 보는 느낌은 예상과는 다르게 친근했다. 자전거, 인력거, 택시, 초라한 집들, 거리의 풍경이 우리 어릴 때의 생활 모습을 연상하게 했고, 내 마음도 어느새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돌아오는 코스는 비교적
올 때보다는 수월하였다. 동해바다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장엄한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금강산쯤으로 짐작되는 비내리는 동해바다에서 돌고래의 향연을 볼 수 있는 행운을 가진 것은 나에겐 행운이었다.
※5박 6일의 짧은 일정이라 아쉬운 점이 많았으나 빈틈없는 일정을 차질없이 안내해준 산정산악회 등반대장 김 홍수님과 총무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from 61.82.223.111
산정인 지난 백두산 일정에 강 선생님과 함께 하게 되어 즐거웠습니다.여행 일정 동안선생님의 다방면의 해박하신 지성과 동료를 배려하시는 따듯한 마음은 함께한 많은 분들은 오래또록 기억할것입니다.함께하신 김 선생님 강 선생님 사모님 모두 안녕하시겠죠?9월의 산정의 산행에 자주 참여하셨으 많은 가르침을 주시길 희망합니다.뵐날을 기다리며....... 2003/08/21
저니 강선생님 백두산종주 등반기 잘 읽었습니다...구름한점없는 천지..안타까움에 바라본 북녘땅...역사의 현장을 두루두루 살펴보시고 꼼꼼하게 챙겨주신 덕분에 ...좋은 공부되었습니다... 가족과 함께한 백두산... 아마..도균군에게도 좋은경험이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2003/08/21
걸어서 하늘까지 선생님 덕택에 산정님들 백두산 잘 다녀오셔네요^^ 가지 못한 분들도 이글을 읽고 백두산과 그주위의 환경이 눈에 아른 거리며^^ 조은후기 감사합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늘 건강하시고 조은 시간 되십시요^^ 2003/08/21
박사 우리나라 조상님들의 얼을 다시한번 답사형식으로서...아!! 만주벌판 넓고깊은 산자락마다 우리민족의 애환이 서려 있고 역사의 숨결이 베어 있는 그곳을 감격스럽게 사실적으로 담담히 기록하구 써주신 '백두산 종주기'에서 소인놈 많이 배우고 갑니다.....강선생님!! 산정인을 위한 따스한 맘씨!!정말 고맙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꾸벅~ 200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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