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己未年) 3 1일 운동은 왜놈들이 나라를 빼앗고 향년 68세의
건장한 고종황제와 민후를 독살하고 악독한 만행을 자행하자 민족적
울분을 일으킨 독립운동에 당시 16세의 이화학당의 학생인 유관순은
고향인 천안시 목천면 지평리로 내려가 수천명의 시위군중의 앞장을
섰다. 그녀의 아버지 유중근은 왜놈 헌병의 발포로 즉사하고 어머니
역시 참살당하고 말았다. 이때 유관순은 체포되어 오빠 관옥과 함께
유치된 뒤에 재판에 회부되어 그녀의 법정투쟁은 유명한 일화로 남
아있다. 그녀는 일제의 재판관을 향하여 이렇게 항변했다.
" 죄를 지은 자는 너희들 일본인이다. 그런 일본인이 우리를 재판할
귄리가 있단 말인가? "
하고 완강한 주장을 굽히지 않자 일제 재판관은,
" 죄를 뉘우치고 일본제국의 시민이 되겠다고 다짐을 하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
는 재판관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 강도를 몰아낸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살아서도 독립만세
죽어서도 독립만세다."
라며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앉자,
" 너희들 조센징이 무슨 독립을 한단 말이야 "
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한 재판관을 향해서 의자를 집어 던졌다,
일경들은 그녀를 감옥에 가두어 온갖 고문으로 밥에 모래와 쇳가
루를 섞어서 먹이고 머리에는 골타르를 칠해 머리 전체를 잡아
당기고, 가발처럼 머리가죽을 벗겨내기도 하였다. 겨드랑이와
음부의 털도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고 태웠다. 코와 귀는 면도날
로 잘리우고 손톱 발톱은 몽땅 집게로 뽑아버렸다. 그러면서도
유관순은 " 독립만세" 를 외치며 끝까지 저항을 하다가 1920년
10월 20일 그처럼 가혹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그녀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17세의 꽃다운 나이 그녀의 사망소식을 접한
이화학당의 프라이 교장은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그녀의 시신
인도를 거듭 요구하자 학교측에 인도된 유관순의 시신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무참히 머리, 몸통, 사지가 따로 따로
여섯토막으로 절단되어 있었고 코와 귀가 잘리우고 머리와 손톱
발톱이 뽑혀진 모습이었다. 우리는 해마다 3.1절이 되면 뻐꾸기
의 목을 쉬게하고, 두견이의 목에서 까지 피울음을 토하게 하고,
지하에 계신 많은 넋들이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없어, 한 마리 뻐
꾸기가 되고, 두견이가 되어 온 겨레의 가슴가슴을 찾아 다니며
실신한 비둘기 옆에서 그날의 잔인했던 왜구들의 총칼에 한 점,
한 점 찟겨진 피덩어리가 되살아나게 하는 이때 우리는 뼈저린
가슴으로 겨레에 사명을 다함은 물론 순국의 넋들께서 편히 잠
들 수 있도록 엄숙한 자세로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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