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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2006년12월31~1일 [무박] 새해 일출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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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선지: 지리산 1915m 천왕봉

언 제:2006년12월31~1일 [무박]23:30

출발장소 :시민회관 앞 [범일동]

산행코스 A:중산리-칼바위-법계사-천왕봉-장터목-하동바위-백무동 [7시간]

코 스 B:백무동-한신계곡 [자유시간]

준비물 : 도시락 물 아이젠 스피츠 랜턴 장갑 모자 윈드자켓

회 비:\35,000

* 2006년 출고한 쾌적한 최고급 신차이용

산행문의:633-5670
팩 서:703-1915

부산 산정산악회 홈 http://www.mysanjung.co.kr

예약필수 :수협 703-02-107066 김 홍수

산행신청=전화&우리 홈 산행신청하기,

공개신청=우리 홈 산행일정 하단 코멘트

*산정산악회는 산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출발시간을 지체하는 부분은 합심하여 안전한 산행종료 유도하는 단체 이지만, 산행 종료 후 음주 등으로 전체 출발시간을 지체하는 부분은 배려하지 않습니다,

*산정산악회는 합법적인 신차 사용을 원칙으로 하고 공식적으로 술과 음식은 일체 제공하지 않는 산행중심의 가이드 문화를 만들어가는 산악회입니다, [산 꾼의 기본 자신이 먹을 것은 본인의 배낭에 스스로 준비 하는 것]

*자발적 참여 속에 다함께 즐기는 산정가이드 산행은 초보의 배려는 산 꾼의 기본이라 생각하며, 초보는 산정산악회 산행에 참여 하는 것이, 고객이나 소비자라고 생각한다면 산정에선 그 욕구 충족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식을 가진 그릇된 초보가 있다면 관광사나 상업적인 단체로 참여해야 바람직 할 것입니다,

*주관사가 고객에게 서비스하는, 도심의 상업성과 비교 할 수없는 아름다움이, 우리 산 꾼 들 에겐 내제되어 있고, 산정은 내제된 그 아름다움을 발산 할 수 있는, 장을 만들기 위해 일관되게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추구 할 것입니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남쪽 끝자락에서 훨훨 일어난 거대한 산괴이다. 서쪽으로는 전남 구례군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전북 남원시에 접하며, 동북쪽으로 경남 함양군과 산청군, 동남쪽으로는 경남 하동군에 접하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대의 단일 산악지대이다.지리산은 거대하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덕천강과 엄천강, 횡천강을 이루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 재가 15곳에 이른다. 또 지리산에서 솟는 샘과 이름을 갖고 있는 전망대, 바위의 숫자만도 각각 50여 개, 마야고와 반야도사, 호야와 연진 등의 설화에 이상향과 신선의 전설을 안고 있는 지리산, 천왕봉 일출, 반야봉 낙조, 세석의 철쭉, 벽소령 달밤, 피아골 단풍, 노고단 운해, 연하봉 설경, 불일폭포, 칠선계곡, 섬진강의 맑은 물로 대표되는 지리산10경을 들먹이지 않고도, 한때 지리산에 350여 군데나 절과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 지리산은 그 자체로서 이미 산으로 충분하다. 지리산은 아무 수식이 필요 없는 산이다.

국가적인 대제사가 거행되던 노고단 -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리산은 신라때부터 남악(南岳)으로 불리며 매년 봄,가을이면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장소였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신으로 모시던 곳이 바로 노고단이며 노고단(老姑壇)의 이름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노고단이나 남악사가 아닌 천왕봉에서 고려시조인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모시는 것으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국가적 제사의 전통은 조선을 거쳐 일제시대에 중지되었다가 현재까지도 남악사 약수제 등으로 남아있다.

삼한시대 달궁계곡 일원은 삼한시대 마한의 왕조가 망명하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온조왕 27년(서기 9년)에 마肌襤떠 멸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34년(서기 16년)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을 토벌한 이야기가 나오고, 신라 탈해왕 5년(서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가 항복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한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3세기 후반 마한세력이 중국과 교류했다고 나오고, 4세기에는 마한의 일부세력이 서해안에 진출했다는 기록도 있는 걸로 보아 부족국가 마한은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달궁마을에 쫓겨와 궁전을 짓고 살았다는 마한의 부족국가가 바로 이들무리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설 - 김명수의 '지리산'중에서].

반란의 산 - 지리산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빨치산과 반란군일 것이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한달이상 노고단의 외국인 별장촌은 반란군 김지회의 근거지였다. 반란군이 물러가고 난 후 국군 토벌대가 다시 들어와 이곳이 또다시 빨치산 거점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태워 버렸다. 노고단고원이 황폐해진 직접적인 이유이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노고단 산장 서측에는 흉물스런 별장촌의 잔해가 남아있고, 외국인 별장촌은 노고단 남쪽 왕시루봉 기슭으로 옮겨져 다시 세워졌다. 6,25 이후 빨치산 잔당들은 또다시 지리산으로 모여들었고, 이는 국군 토벌대의 무차별 포격, 방화로 이어지고 만다. 피아골 산장터에서 한트럭분 이상의 인골(빨치산의 것으로 추정)이 나왔다는 사실은 얼마나 토벌작전이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에 불과하다. 1952년 빨치산 대몰살의 현장이었던 대성골, 거림골, 빗점골, 의신부락등은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오늘날까지도 대성골의 숨은 골짜기에서 인골이 종종 목격되곤 한다. 당시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죄없는 양민이 국군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역사로 남아있다.

지리산은 빨치산 토벌대의 무자비한 토벌과 이를 빌미로한 산악도로의 건설로 이중의 아픔을 겪어왔다. '빈대 한 마리 잡으려 초가삼간 태운다'더니 빨치산에 한번 덴 권력자들은 지리산의 서북능선을 주능선과 뚝 떼어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노고단 턱밑을 깎아 건설한 성삼재 861번 지방도로가 그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능선마저 반으로 갈라 놓으려는 모략이 벽소령 관광도로 포장이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시작되었으나 다행히 벽소령은 포장되지 않고 남아있게 되었다. 서북능선은 만복대 아래서 정령치도로에 잘리워 지리산의 섬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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