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는 산'을 '오르는 산'으로 바꾼 개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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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자유인 안경호!
안경호 대장이 돌아가셨다! 사고가 아니라 암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산악계의 건각이 고희도 못 넘기고 대장암 따위에 지다니! 느닷없는 소식에 땅이 꺼진다. 장례는 언젠가. 그날 아침 이미 끝나버렸단다. 무덤이라도 찾아야지. 무덤이라도 찾아서 그 좋아하는 술이라도 한 잔 올려야지. 무덤도 없단다. 화장하여 좋아하는 산길 옆 초목에라도 뿌려주었는가. 그것도 아니란다. 의학계에 연구용으로 기증하고 갔단다. 세상에! 세상에! 그의 열린 정신과 빠른 걸음을 누가 따라잡겠는가.
그는 모든 면에서 특별하고 생각과 걸음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의 발자취 따라 새로운 길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보통 사람들이 그 결과를 의심하며 망설이고 있을 때, 그는 성큼 발을 내딛어 전신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이 선택한 길을 뚫고 나와 보였다. 보통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곳에 또 다른 길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이렇게 남보다 앞서서 수많은 산길을 개척하였다. 수많은 산과 산길들에 대한 정보를 묶어 차례차례 책으로 엮어 내었다. <한국의 100 명산·200 명산·400 명산>, <알려지지 않은 산이 더 좋다>, <명산 코스 가이드>, <산경표 산줄기 찾기>, <실전 낙동정맥·호남정맥 종주산행> 등의 저서는 그가 얼마나 치밀하며 열정적이며 지속적으로 이 땅의 산들을 껴안고 살았던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그는 이 땅의 산들을 ‘바라보는 산’에서 ‘오르는 산, 걷는 산’으로 바꾸어 놓은 개척자이며, 한국 안내산행계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1970년에 한국요산회를 창설하여 산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던 일반인들을 전문 산꾼으로 탈바꿈 시켜놓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산을 제대로 타는 사람이었다. 걷기로 한 길은 제대로 걷고 내려왔다. 오른 길로 되짚어 내려오는 걸 싫어하여서 그를 따라가면 언제나 설레임을 지닌 채 새로운 산길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업적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누구보다도 먼저 ‘산경표 산줄기’ 찾기에 뛰어든 일이다.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시되고 왜곡되어 해방 반세기가 넘도록 고개 들지 못하고 있던, 우리 고유의 산줄기 존재 확인에 나섰던 것이다.
그는 자유인이었다. 어디에든 무엇에든 묶이는 걸 싫어했다. 그는 우리 땅 우리 산의 한계를 건너뛰어 세계의 명산을 찾는 데도 열심이었다. 그의 적지 않은 업적들은 자신의 시간과 행동에 자유를 부여할 수 있었던 삶과 자유로운 정신으로부터 나왔으리라 믿는다.
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모른다. 그는 스타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충실하였듯이 이미지 관리에도 냉정을 지켰기 때문이다. 병으로 상한 모습은 그의 가족 외에는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생애를 걸고 가꾸어온 꼿꼿하고 건강한 이미지를 그대로 지니고 떠난 것이다. 불길이 꺼지는 순간까지 제 몸을 태워서 주위를 밝히는 촛불처럼, 너무나 깨끗하게 68년의 생애를 단숨에 거두어 무(無)로 돌아 가버린 사람. 삼가 명복을 빈다. 그는 진정한 자연주의자였다.
글 이향지 시인
안경호 대장이 돌아가셨다! 사고가 아니라 암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산악계의 건각이 고희도 못 넘기고 대장암 따위에 지다니! 느닷없는 소식에 땅이 꺼진다. 장례는 언젠가. 그날 아침 이미 끝나버렸단다. 무덤이라도 찾아야지. 무덤이라도 찾아서 그 좋아하는 술이라도 한 잔 올려야지. 무덤도 없단다. 화장하여 좋아하는 산길 옆 초목에라도 뿌려주었는가. 그것도 아니란다. 의학계에 연구용으로 기증하고 갔단다. 세상에! 세상에! 그의 열린 정신과 빠른 걸음을 누가 따라잡겠는가.
그는 모든 면에서 특별하고 생각과 걸음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의 발자취 따라 새로운 길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보통 사람들이 그 결과를 의심하며 망설이고 있을 때, 그는 성큼 발을 내딛어 전신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이 선택한 길을 뚫고 나와 보였다. 보통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곳에 또 다른 길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이렇게 남보다 앞서서 수많은 산길을 개척하였다. 수많은 산과 산길들에 대한 정보를 묶어 차례차례 책으로 엮어 내었다. <한국의 100 명산·200 명산·400 명산>, <알려지지 않은 산이 더 좋다>, <명산 코스 가이드>, <산경표 산줄기 찾기>, <실전 낙동정맥·호남정맥 종주산행> 등의 저서는 그가 얼마나 치밀하며 열정적이며 지속적으로 이 땅의 산들을 껴안고 살았던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그는 이 땅의 산들을 ‘바라보는 산’에서 ‘오르는 산, 걷는 산’으로 바꾸어 놓은 개척자이며, 한국 안내산행계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1970년에 한국요산회를 창설하여 산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던 일반인들을 전문 산꾼으로 탈바꿈 시켜놓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산을 제대로 타는 사람이었다. 걷기로 한 길은 제대로 걷고 내려왔다. 오른 길로 되짚어 내려오는 걸 싫어하여서 그를 따라가면 언제나 설레임을 지닌 채 새로운 산길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업적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누구보다도 먼저 ‘산경표 산줄기’ 찾기에 뛰어든 일이다.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시되고 왜곡되어 해방 반세기가 넘도록 고개 들지 못하고 있던, 우리 고유의 산줄기 존재 확인에 나섰던 것이다.
그는 자유인이었다. 어디에든 무엇에든 묶이는 걸 싫어했다. 그는 우리 땅 우리 산의 한계를 건너뛰어 세계의 명산을 찾는 데도 열심이었다. 그의 적지 않은 업적들은 자신의 시간과 행동에 자유를 부여할 수 있었던 삶과 자유로운 정신으로부터 나왔으리라 믿는다.
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모른다. 그는 스타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충실하였듯이 이미지 관리에도 냉정을 지켰기 때문이다. 병으로 상한 모습은 그의 가족 외에는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생애를 걸고 가꾸어온 꼿꼿하고 건강한 이미지를 그대로 지니고 떠난 것이다. 불길이 꺼지는 순간까지 제 몸을 태워서 주위를 밝히는 촛불처럼, 너무나 깨끗하게 68년의 생애를 단숨에 거두어 무(無)로 돌아 가버린 사람. 삼가 명복을 빈다. 그는 진정한 자연주의자였다.
글 이향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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