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 [77년 고상돈] 원정대장 김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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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士에게 듣는 山이야기] 영원한 에베레스트 원정대장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장
“산악인은 자신의 경험을 책 통해 공유해야”
▲ 선인봉을 바라보며 옛 추억을 떠올리는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 소장.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 소장(金永棹·81·전 대한산악연맹 회장)은 산악계에서는 영원한 청년이자 영원한 에베레스트 원정대장으로 불린다. 77년 9월15일 지구의 용마루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을 이끌어낸 ’77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으로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산악인으로 각인된 것이다. 그는 팔순인데도 산악행사에서 축사나 격려사를 할 때면 스피커가 없더라도 쩌렁쩌렁 울릴 만큼 당당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 외에도 그가 한국 산악계에 이바지한 바는 많다. 70년과 71년 전국 명산에 34개의 대피소를 짓는 사업을 주도했고, 71년 로체샤르 원정이 성사되게 하는 데도 큰 몫을 했다. 9대 국회의원이던 77년 대한산악연맹 회장에 취임한 이듬해인 78년 북극 탐험에 나서는 등 현역으로서 활발하게 탐험활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80년 회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대산련을 단단하게 자리 잡게 하며 산악행정가로서의 기량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82년부터는 한국등산연구소 소장으로 지내면서 수필집 <우리는 산에 오르고 있는가>와 <산의 사상> 등을 내고, 독일어 영어 일본어 3개 국어 독해능력을 발휘해 해외 산서를 번역하는 등 산악문화 부문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라인홀트 메스너의 <검은 고독 흰 고독>, <죽음의 지대>, <제7급>, 이본 취나드의 <아이스클라이밍>, 에드워드 윔퍼의 <알프스 등반기>, 존 헌트경의 <에베레스트 등정기> 등 여러 권의 해외 산서를 번역했고, 요즘도 또 한 권의 해외 산서를 펴내기 위해 마무리를 하고 있는 등 산악서적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이어나가고 있다.
전국 명산에 대피소 건립 주도하고 대산련 회장도 지내
2월17일 오전, 김영도 소장과 산행을 약속한 도봉산은 하루 전 내린 눈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도봉구와 의정부시를 잇는 도봉대로에서도 선인봉과 그 양옆의 능선과 바위들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아침 신문 보니까 참 안 되었대요. 촉망받는 클라이머였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박정헌씨가 어서 병상에서 일어나서 그의 생환기를 꼭 자기 손으로 쓸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래야 하나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설 수 있을 테니까요.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김 회장은 도봉산파출소 앞에서 만나자마자 이 날 조선일보 톱기사를 장식한 박정헌씨와 최강식씨 얘기부터 꺼냈다. 두 사람이 촐라체 북벽 등반을 마치고 하산 도중 자일파트너가 크레바스 빠지는 사고를 겪은 다음 최악의 상황에서 모진 고통을 겪다가 구조되었으나 심각한 동상으로 손가락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기사 내용이었다.
김영도 소장은 내로라하는 전문등반을 해본 적은 없다. 46년 서울대 예과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성동역에서 기차 타고 창동역까지 간 다음 논밭길 따라 우이동 버스종점을 거쳐 백운대에 올랐다가 산성을 따라 세검정까지 걸어갔고, 60년대 초 수유동으로 이사한 후 인연 맺은 고 김장호 시인이나 평화출판사 허창성 사장 등과 어울려 인수봉의 평범한 코스나 오봉을 오른 게 기억나는 젊은 시절의 산행일 정도다. 그러나 아마추어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성장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올해 우리 나이 82. 언뜻 그 나이를 떠올리면 지팡이 짚고 나들이도 조심조심하리라 예상되건만 그는 꼿꼿하면서도 기운찬 청년의 모습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김영도 소장에게 산길을 걷는 속도는 나이와 관계가 없었다.
“원두커피 끓이는 솜씨는 일품이었죠. 산장 안에 들어설 때마다 풍기던 은은한 커피향은 지금도 느껴지는 듯 생생하답니다.”
파출소 앞을 출발해 30분쯤 걷자 도봉산장 앞 갈림목에 닿았다. 김 소장은 산장을 바라보며 10여 년 전 세상을 등진 도봉산장 관리인 유용서씨를 떠올렸다. 산장 안에 들어서자 반백의 유씨 아내는 모처럼 산장을 찾은 김 소장을 반겨주었다.
“공화당 사무국 시절 간부들은 골프 치러 다닐 때 저는 공화산악회 회원들과 어울려 산에 다녔습니다. 그러다 선전부장 시절 산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전국 명산에 산장 짓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고요. 그리고 나니까 로체샤르 원정 얘기가 나오더군요. 대장인 박철암씨가 경비가 모자란다고 하지 뭡니까. 그래서 대통령께 한국인들이 히말라야 고산에 도전하려 하니 도와달라는 내용의 품위서를 올렸더니 400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이 내려오더군요.”
▲ 선인봉을 배경으로. 김 소장은 산서를 통해 경험을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 소장은 경비를 마련해주면서 박철암씨에게 딱 한 가지를 부탁했다. 에베레스트 입산신청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에베레스트는 시즌당 한 팀씩, 1년에 두 팀밖에 등반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이미 외국 원정대들이 여러 팀 밀려 있었다. 그런데 신청해놓곤 잊은 채로 지내던 74년 봄 프랑스팀 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들의 74년 등반허가와 한국팀의 77년 허가를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대원 선발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욕심을 낼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예정대로 에베레스트 서릉을 등반한 프랑스팀은 로라에서 일어난 눈사태에 대장과 셰르파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어쨌든 산장 건립으로 산악계에 알려진 다음 로체샤르 원정을 후원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대한산악연맹 부회장과 에베레스트 원정대장에 이어 대한산악연맹 회장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특히 원정을 한 해 앞둔 76년 초 설악골 눈사태 사고로 모든 게 끝났다 싶었으니까요.”
도봉산장을 나와 만월암으로 향하던 중 선인봉이 빤히 바라보이는 지점에 이르자 그는 에베레스트 훈련등반 중 사망한 전재운씨를 떠올렸다. 원정을 1년 반 앞둔 76년 1월 당시 군복무 중이던 전재운씨는 김영도 대장의 요청으로 휴가를 받아내 설악산 훈련등반에 참가했다. 그런데 폭설에 이은 눈사태로 전씨를 포함한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고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밀어붙였다. 경비의 절반은 국고 지원으로 해결하고 나머지 반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한국일보 사주가 갑자기 사망하자 아들을 찾아가 “선친의 유업이 무산되게 해서는 안 된다”며 끝내 지원을 이끌어냈다. 원정에 나서서는 1차 공격조인 박상렬씨가 마지막 캠프를 출발했다가 해발 8,700m 지점에서 비박하고 초주검이 된 상태로 하산, 분위기가 침체돼 또다시 무산되는 듯싶었으나 김 대장은 2차 공격을 강행시켜 고 고상돈씨의 한국 최초 세계 최고봉 등정을 이끌어낸 것이다.
“박상렬 대원이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지에서 돌아왔는데도 텐트 밖으로 나가보지도 않았습니다. 마지막 캠프에서 산소를 마시고 자야 다음날 산소를 마실 때 효과가 제대로 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는데, 눈에 박힌 산소통이 빠져나오지 않자 그냥 자버렸고, 그래서 이튿날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래서 화가 났던 거죠. 지났으니까 말이지, 후배가 무사히 귀환했쨉 기쁘지 않을 리 있었겠습니까, ABC(6,500m) 텐트 안 슬리핑백에 엎드려 엉엉 울었으니까요.”
"등산은 죽음과 대결하는 무상의 행위"
▲ 만월암. 76년 설악골 눈사태 사고 얘기를 꺼낼 때는 김 소장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제 내린 눈이 겨울답지 않게 따스한 햇살에 녹아내리면서 눈길은 질척거리며 미끄러웠다. 그런데도 노익장은 잰걸음으로 뒤따르는 이들을 바쁘게 했다. 만월암 오르는 길은 바위에 눈이 덮여 더욱 미끄러웠다. 만월암 위쪽 너럭바위에 앉자 과일을 깎아 먹으며 얘기를 나누는 사이 등산인들이 떼를 지어 올라왔다.
“정말 용합니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저렇게 복장도 제대로 갖추고, 평일에도 올라올 수 있다는 게 말입니다. 그렇지만 건강이나 여가선용을 위해 산에 다닌 사람들은 달갑지 않습니다. 공기 좋은 산에 다니다 보면 건강이 좋아진다는 식으로 등산을 격하시켜서는 안 됩니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등산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이자 도전입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도식적인 세계에서의 탈출이랄 수 있을 것이고요. 건강이란 등산의 부산물일 따름입니다.”
김영도 소장은 산에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에 대해서는 반가워하면서도 장비가 고급화되고 지나치게 기능화되는 것에 대해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좋은 장비를 쓰다보면 체험의 강도는 반대로 약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결국 깊은 정신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마칼루 초등에 성공한 프랑스팀 대장이 한 말이 있습니다. 등산은 스포츠이자 정열이며 일상에서의 탈출이자 일종의 종교라는 거죠. 형이하학적으로는 심판도 룰도 관중도 없는 스포츠지만, 형이상학적으로 볼 때는 무상의 행위이며 늘 죽음과 대결하는 행위입니다. 이게 다른 스포츠와 틀린 점이죠.”
만월암 너럭바위에서 선인봉 기슭 트래버스 길을 따라 석굴암으로 향하는 사이 눈길은 무척 미끄러웠다. 김 소장은 가파른 바위를 내려설 때마다 기우뚱하며 불안케 했으나, 그때마다 곧 쓸데없는 걱정임을 깨닫게 했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잡으며 자세를 바로 잡고 또다시 잰걸음으로 앞서갔다.
한국산서회 창립회원이기도 한 김영도 소장은 산악인들이 산악서적 읽기에 게을리 하고, 자신의 산행기를 쓰는 데 관심이 없는 데 대해 무척 안타까워하고 있다. 산행 중 감동받은 산서 얘기를 수시로 늘어놓던 그는 “돈 많이 벌어 좋은 아파트에서 좋은 자가용 끌면서 사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남의 좋은 글을 읽고 가슴이 설레 밤잠을 설치는 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되묻는다.
“하찮은 내용이라도 정리해 놓았다가 나이 먹어 산에 다지지 못할 때 먼지 푹 덮인 서재에서 꺼내 젊은 날 자신의 산행기를 읽는다면 얼마나 감동적이겠습니까. 인생의 즐거움은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더욱이 등반가라면 자신의 등반을 글로 나타내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경험이 공유되고, 더욱 훌륭한 등반이 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산에 미쳐 다니는 산악인일지라도 자신의 등반을 정리할 줄 모른다면 투자에 대한 효과를 제대로 못 거두는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김 회장은 1924년 평북 정주 태생이다. 5살 때 평양으로 이사해 평양고보를 나올 때까지 북한에서 지냈고, 46년 현 서울대인 경성대 예과에 입학하면서 서울에서 생활했다. 55년 육군 대위로 예편한 다음에는 국회 사무총장실에도 근무하고, 육사 교수와 성동고 교사생활도 했다. 82년부터는 한국등산연구소 소장으로 지내고 있다. 산서를 사랑하고 산서를 통해 우리의 산악문화를 발전시키려 애쓰는 한국산서회 회원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등산이 전공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외국 등산서적을 여러 권 우리말로 옮기고 등산에 대한 글도 많이 쓴 거죠. 등산을 통해 얻은 체험과 사색을 주제로 한때 강의도 많이 했고, 등산학교 같은 기관을 통해 사회인들을 만나는 것도 등산가로서의 보람이었으니까요. 한평생 큰 후회 없이 살아온 것 같습니다.”
석굴암 아래 경찰구조대 막사에 도착할 즈음 하늘은 더욱 파랗고 햇살은 더욱 눈부시게 쏟아졌다. 정수리 아래 흰 눈 인 선인봉도 환한 모습이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김영도 소장은 원로장로로 있는 수유동 성북교회 교우들과 몇 해 동안 산행을 해왔다. 일요일 예배가 끝난 다음 교회 부근의 산을 오르다가 “명색이 에베레스트 대장까지 했는데 북한산만 오를 수 있냐?”며 교우들을 설득해 덕유산, 월악산, 오대산, 지리산도 다녔다. 3·1절에도 정기산행에 나설 계획이다. 이밖에도 집 부근의 수락산을 매주 한 차례씩 오르고, 국회의원 출신 지인들과 어울려 매달 한 차례씩 산행하고 있다.
아홉 살 아래인 아내 이혜경 여사는 이태 전부터 파킨슨씨병으로 투병중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을 제대로 못 움직이는 병이다 보니, 그도 자유스러울 수 없다. 그렇지만 산악인들이나 지인들 만나는 일만큼은 게을리하지 않는다. 창립회원으로 있는 한국산서회뿐 아니라 괴테를 좋아하는 모임에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참석한다. 그렇게 시내 모임이 있을 때는 집 근처 회룡역에서 전철을 이용한다. 전철에서는 서서 있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다. 건강 때문이라기보다는 전철 안에 서서 책을 읽을 때 가장 집중이 잘 되기 때문이다. 번역작업까지도 전철 안에 서서 할 적도 많다.
“가까이 사는 막내딸이 세계 산악계 거장들에 대해 제법 꿰고 있답니다. 번역중인 해외 산서의 원고를 여러 해 동안 교정보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된 거죠. 제목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3월 중에 산서 또 한 권을 펴낼 계획입니다.”
“이제 에베레스트는 작아졌습니다”
오후 2시를 넘어서면서 배가 꼬르륵거렸다. 하산을 재촉하는 소리였다. 김 소장은 히말라야를 수직의 세계라 표현하고, 북극을 수평의 세계라 표현한다. 그래서 에베레스트는 올랐던 길만 따르면 밑으로 내려설 수 있으나, 360도 빙 돌아봐도 아무 것도 눈에 걸리는 게 없는 극지에서는 원반에 서 있는 거나 다름없고, 그래서 길을 제대로 찾아나가지 못하면 결국 우주의 미아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 두 세계를 모두 경험했다. 그래서 두 세계를 다시 찾고 싶은 마음도 늘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77년 원정 이후 에베레스트를 가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며칠간 머물며 옛 일을 떠올리고픈 마음은 있지만, 시즌이면 식수가 부족해서 난리라는 지금의 베이스캠프를 상상하면 안 가느니 못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도 소장은 “그보다는 재작년 85,000원 주고 산 고어텍스 군용 침낭커버를 쓸 기회나 한 번 가졌으면 한다”며 “ 깊은 산에 들어가 팀스피리트 때 사용하는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커버를 덮어쓴 채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게 지금은 가장 하고픈 산행”이라고 여든이 넘은 고령에도 산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글 한필석 기자
사진 허재성 기자
05.년 월간 산 3월호 명사 에게 듣는다,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장
“산악인은 자신의 경험을 책 통해 공유해야”
▲ 선인봉을 바라보며 옛 추억을 떠올리는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 소장.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 소장(金永棹·81·전 대한산악연맹 회장)은 산악계에서는 영원한 청년이자 영원한 에베레스트 원정대장으로 불린다. 77년 9월15일 지구의 용마루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을 이끌어낸 ’77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으로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산악인으로 각인된 것이다. 그는 팔순인데도 산악행사에서 축사나 격려사를 할 때면 스피커가 없더라도 쩌렁쩌렁 울릴 만큼 당당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 외에도 그가 한국 산악계에 이바지한 바는 많다. 70년과 71년 전국 명산에 34개의 대피소를 짓는 사업을 주도했고, 71년 로체샤르 원정이 성사되게 하는 데도 큰 몫을 했다. 9대 국회의원이던 77년 대한산악연맹 회장에 취임한 이듬해인 78년 북극 탐험에 나서는 등 현역으로서 활발하게 탐험활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80년 회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대산련을 단단하게 자리 잡게 하며 산악행정가로서의 기량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82년부터는 한국등산연구소 소장으로 지내면서 수필집 <우리는 산에 오르고 있는가>와 <산의 사상> 등을 내고, 독일어 영어 일본어 3개 국어 독해능력을 발휘해 해외 산서를 번역하는 등 산악문화 부문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라인홀트 메스너의 <검은 고독 흰 고독>, <죽음의 지대>, <제7급>, 이본 취나드의 <아이스클라이밍>, 에드워드 윔퍼의 <알프스 등반기>, 존 헌트경의 <에베레스트 등정기> 등 여러 권의 해외 산서를 번역했고, 요즘도 또 한 권의 해외 산서를 펴내기 위해 마무리를 하고 있는 등 산악서적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이어나가고 있다.
전국 명산에 대피소 건립 주도하고 대산련 회장도 지내
2월17일 오전, 김영도 소장과 산행을 약속한 도봉산은 하루 전 내린 눈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도봉구와 의정부시를 잇는 도봉대로에서도 선인봉과 그 양옆의 능선과 바위들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아침 신문 보니까 참 안 되었대요. 촉망받는 클라이머였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박정헌씨가 어서 병상에서 일어나서 그의 생환기를 꼭 자기 손으로 쓸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래야 하나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설 수 있을 테니까요.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김 회장은 도봉산파출소 앞에서 만나자마자 이 날 조선일보 톱기사를 장식한 박정헌씨와 최강식씨 얘기부터 꺼냈다. 두 사람이 촐라체 북벽 등반을 마치고 하산 도중 자일파트너가 크레바스 빠지는 사고를 겪은 다음 최악의 상황에서 모진 고통을 겪다가 구조되었으나 심각한 동상으로 손가락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기사 내용이었다.
김영도 소장은 내로라하는 전문등반을 해본 적은 없다. 46년 서울대 예과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성동역에서 기차 타고 창동역까지 간 다음 논밭길 따라 우이동 버스종점을 거쳐 백운대에 올랐다가 산성을 따라 세검정까지 걸어갔고, 60년대 초 수유동으로 이사한 후 인연 맺은 고 김장호 시인이나 평화출판사 허창성 사장 등과 어울려 인수봉의 평범한 코스나 오봉을 오른 게 기억나는 젊은 시절의 산행일 정도다. 그러나 아마추어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성장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올해 우리 나이 82. 언뜻 그 나이를 떠올리면 지팡이 짚고 나들이도 조심조심하리라 예상되건만 그는 꼿꼿하면서도 기운찬 청년의 모습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김영도 소장에게 산길을 걷는 속도는 나이와 관계가 없었다.
“원두커피 끓이는 솜씨는 일품이었죠. 산장 안에 들어설 때마다 풍기던 은은한 커피향은 지금도 느껴지는 듯 생생하답니다.”
파출소 앞을 출발해 30분쯤 걷자 도봉산장 앞 갈림목에 닿았다. 김 소장은 산장을 바라보며 10여 년 전 세상을 등진 도봉산장 관리인 유용서씨를 떠올렸다. 산장 안에 들어서자 반백의 유씨 아내는 모처럼 산장을 찾은 김 소장을 반겨주었다.
“공화당 사무국 시절 간부들은 골프 치러 다닐 때 저는 공화산악회 회원들과 어울려 산에 다녔습니다. 그러다 선전부장 시절 산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전국 명산에 산장 짓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고요. 그리고 나니까 로체샤르 원정 얘기가 나오더군요. 대장인 박철암씨가 경비가 모자란다고 하지 뭡니까. 그래서 대통령께 한국인들이 히말라야 고산에 도전하려 하니 도와달라는 내용의 품위서를 올렸더니 400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이 내려오더군요.”
▲ 선인봉을 배경으로. 김 소장은 산서를 통해 경험을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 소장은 경비를 마련해주면서 박철암씨에게 딱 한 가지를 부탁했다. 에베레스트 입산신청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에베레스트는 시즌당 한 팀씩, 1년에 두 팀밖에 등반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이미 외국 원정대들이 여러 팀 밀려 있었다. 그런데 신청해놓곤 잊은 채로 지내던 74년 봄 프랑스팀 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들의 74년 등반허가와 한국팀의 77년 허가를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대원 선발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욕심을 낼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예정대로 에베레스트 서릉을 등반한 프랑스팀은 로라에서 일어난 눈사태에 대장과 셰르파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어쨌든 산장 건립으로 산악계에 알려진 다음 로체샤르 원정을 후원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대한산악연맹 부회장과 에베레스트 원정대장에 이어 대한산악연맹 회장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특히 원정을 한 해 앞둔 76년 초 설악골 눈사태 사고로 모든 게 끝났다 싶었으니까요.”
도봉산장을 나와 만월암으로 향하던 중 선인봉이 빤히 바라보이는 지점에 이르자 그는 에베레스트 훈련등반 중 사망한 전재운씨를 떠올렸다. 원정을 1년 반 앞둔 76년 1월 당시 군복무 중이던 전재운씨는 김영도 대장의 요청으로 휴가를 받아내 설악산 훈련등반에 참가했다. 그런데 폭설에 이은 눈사태로 전씨를 포함한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고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밀어붙였다. 경비의 절반은 국고 지원으로 해결하고 나머지 반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한국일보 사주가 갑자기 사망하자 아들을 찾아가 “선친의 유업이 무산되게 해서는 안 된다”며 끝내 지원을 이끌어냈다. 원정에 나서서는 1차 공격조인 박상렬씨가 마지막 캠프를 출발했다가 해발 8,700m 지점에서 비박하고 초주검이 된 상태로 하산, 분위기가 침체돼 또다시 무산되는 듯싶었으나 김 대장은 2차 공격을 강행시켜 고 고상돈씨의 한국 최초 세계 최고봉 등정을 이끌어낸 것이다.
“박상렬 대원이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지에서 돌아왔는데도 텐트 밖으로 나가보지도 않았습니다. 마지막 캠프에서 산소를 마시고 자야 다음날 산소를 마실 때 효과가 제대로 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는데, 눈에 박힌 산소통이 빠져나오지 않자 그냥 자버렸고, 그래서 이튿날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래서 화가 났던 거죠. 지났으니까 말이지, 후배가 무사히 귀환했쨉 기쁘지 않을 리 있었겠습니까, ABC(6,500m) 텐트 안 슬리핑백에 엎드려 엉엉 울었으니까요.”
"등산은 죽음과 대결하는 무상의 행위"
▲ 만월암. 76년 설악골 눈사태 사고 얘기를 꺼낼 때는 김 소장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제 내린 눈이 겨울답지 않게 따스한 햇살에 녹아내리면서 눈길은 질척거리며 미끄러웠다. 그런데도 노익장은 잰걸음으로 뒤따르는 이들을 바쁘게 했다. 만월암 오르는 길은 바위에 눈이 덮여 더욱 미끄러웠다. 만월암 위쪽 너럭바위에 앉자 과일을 깎아 먹으며 얘기를 나누는 사이 등산인들이 떼를 지어 올라왔다.
“정말 용합니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저렇게 복장도 제대로 갖추고, 평일에도 올라올 수 있다는 게 말입니다. 그렇지만 건강이나 여가선용을 위해 산에 다닌 사람들은 달갑지 않습니다. 공기 좋은 산에 다니다 보면 건강이 좋아진다는 식으로 등산을 격하시켜서는 안 됩니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등산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이자 도전입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도식적인 세계에서의 탈출이랄 수 있을 것이고요. 건강이란 등산의 부산물일 따름입니다.”
김영도 소장은 산에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에 대해서는 반가워하면서도 장비가 고급화되고 지나치게 기능화되는 것에 대해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좋은 장비를 쓰다보면 체험의 강도는 반대로 약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결국 깊은 정신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마칼루 초등에 성공한 프랑스팀 대장이 한 말이 있습니다. 등산은 스포츠이자 정열이며 일상에서의 탈출이자 일종의 종교라는 거죠. 형이하학적으로는 심판도 룰도 관중도 없는 스포츠지만, 형이상학적으로 볼 때는 무상의 행위이며 늘 죽음과 대결하는 행위입니다. 이게 다른 스포츠와 틀린 점이죠.”
만월암 너럭바위에서 선인봉 기슭 트래버스 길을 따라 석굴암으로 향하는 사이 눈길은 무척 미끄러웠다. 김 소장은 가파른 바위를 내려설 때마다 기우뚱하며 불안케 했으나, 그때마다 곧 쓸데없는 걱정임을 깨닫게 했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잡으며 자세를 바로 잡고 또다시 잰걸음으로 앞서갔다.
한국산서회 창립회원이기도 한 김영도 소장은 산악인들이 산악서적 읽기에 게을리 하고, 자신의 산행기를 쓰는 데 관심이 없는 데 대해 무척 안타까워하고 있다. 산행 중 감동받은 산서 얘기를 수시로 늘어놓던 그는 “돈 많이 벌어 좋은 아파트에서 좋은 자가용 끌면서 사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남의 좋은 글을 읽고 가슴이 설레 밤잠을 설치는 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되묻는다.
“하찮은 내용이라도 정리해 놓았다가 나이 먹어 산에 다지지 못할 때 먼지 푹 덮인 서재에서 꺼내 젊은 날 자신의 산행기를 읽는다면 얼마나 감동적이겠습니까. 인생의 즐거움은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더욱이 등반가라면 자신의 등반을 글로 나타내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경험이 공유되고, 더욱 훌륭한 등반이 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산에 미쳐 다니는 산악인일지라도 자신의 등반을 정리할 줄 모른다면 투자에 대한 효과를 제대로 못 거두는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김 회장은 1924년 평북 정주 태생이다. 5살 때 평양으로 이사해 평양고보를 나올 때까지 북한에서 지냈고, 46년 현 서울대인 경성대 예과에 입학하면서 서울에서 생활했다. 55년 육군 대위로 예편한 다음에는 국회 사무총장실에도 근무하고, 육사 교수와 성동고 교사생활도 했다. 82년부터는 한국등산연구소 소장으로 지내고 있다. 산서를 사랑하고 산서를 통해 우리의 산악문화를 발전시키려 애쓰는 한국산서회 회원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등산이 전공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외국 등산서적을 여러 권 우리말로 옮기고 등산에 대한 글도 많이 쓴 거죠. 등산을 통해 얻은 체험과 사색을 주제로 한때 강의도 많이 했고, 등산학교 같은 기관을 통해 사회인들을 만나는 것도 등산가로서의 보람이었으니까요. 한평생 큰 후회 없이 살아온 것 같습니다.”
석굴암 아래 경찰구조대 막사에 도착할 즈음 하늘은 더욱 파랗고 햇살은 더욱 눈부시게 쏟아졌다. 정수리 아래 흰 눈 인 선인봉도 환한 모습이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김영도 소장은 원로장로로 있는 수유동 성북교회 교우들과 몇 해 동안 산행을 해왔다. 일요일 예배가 끝난 다음 교회 부근의 산을 오르다가 “명색이 에베레스트 대장까지 했는데 북한산만 오를 수 있냐?”며 교우들을 설득해 덕유산, 월악산, 오대산, 지리산도 다녔다. 3·1절에도 정기산행에 나설 계획이다. 이밖에도 집 부근의 수락산을 매주 한 차례씩 오르고, 국회의원 출신 지인들과 어울려 매달 한 차례씩 산행하고 있다.
아홉 살 아래인 아내 이혜경 여사는 이태 전부터 파킨슨씨병으로 투병중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을 제대로 못 움직이는 병이다 보니, 그도 자유스러울 수 없다. 그렇지만 산악인들이나 지인들 만나는 일만큼은 게을리하지 않는다. 창립회원으로 있는 한국산서회뿐 아니라 괴테를 좋아하는 모임에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참석한다. 그렇게 시내 모임이 있을 때는 집 근처 회룡역에서 전철을 이용한다. 전철에서는 서서 있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다. 건강 때문이라기보다는 전철 안에 서서 책을 읽을 때 가장 집중이 잘 되기 때문이다. 번역작업까지도 전철 안에 서서 할 적도 많다.
“가까이 사는 막내딸이 세계 산악계 거장들에 대해 제법 꿰고 있답니다. 번역중인 해외 산서의 원고를 여러 해 동안 교정보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된 거죠. 제목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3월 중에 산서 또 한 권을 펴낼 계획입니다.”
“이제 에베레스트는 작아졌습니다”
오후 2시를 넘어서면서 배가 꼬르륵거렸다. 하산을 재촉하는 소리였다. 김 소장은 히말라야를 수직의 세계라 표현하고, 북극을 수평의 세계라 표현한다. 그래서 에베레스트는 올랐던 길만 따르면 밑으로 내려설 수 있으나, 360도 빙 돌아봐도 아무 것도 눈에 걸리는 게 없는 극지에서는 원반에 서 있는 거나 다름없고, 그래서 길을 제대로 찾아나가지 못하면 결국 우주의 미아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 두 세계를 모두 경험했다. 그래서 두 세계를 다시 찾고 싶은 마음도 늘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77년 원정 이후 에베레스트를 가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며칠간 머물며 옛 일을 떠올리고픈 마음은 있지만, 시즌이면 식수가 부족해서 난리라는 지금의 베이스캠프를 상상하면 안 가느니 못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도 소장은 “그보다는 재작년 85,000원 주고 산 고어텍스 군용 침낭커버를 쓸 기회나 한 번 가졌으면 한다”며 “ 깊은 산에 들어가 팀스피리트 때 사용하는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커버를 덮어쓴 채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게 지금은 가장 하고픈 산행”이라고 여든이 넘은 고령에도 산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글 한필석 기자
사진 허재성 기자
05.년 월간 산 3월호 명사 에게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