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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ㅣ박영석 산악 그랜드슬램] 북극점 도보탐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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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산정인 이름으로 검색 작성자 산정인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2,452회 작성일 2005-06-09 2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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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ㅣ박영석 산악 그랜드슬램] 북극점 도보탐험기

‘드디어 마지막 별을 따냈다’
“단 1%의 가능성만 보여도 멈출 수 없었다”
박영석 원정대, 54일만에 북극점 도보탐험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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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 90°00′000" 북극점에 도달, 감격에 겨워 울부짖는 박영석 대장. 뒤에 서 있는 오희준 대원의 눈도 글썽거리고 있다.
현지시각 3월8일 오전 11시 캐나다 최북단 육지인 워드헌트(Ward Hunt·북위 83°3′)를 출발한 이후 박영석 대장(朴英碩·42·동국대OB·골드윈코리아 이사)을 비롯, 홍성택(洪成澤·39·용인대 OB·장비 및 촬영 담당), 오희준(吳熙俊·35·영천산악회·식량 담당), 정찬일(鄭贊一·25·용인대 OB·의료 및 인터넷 중계담당) 대원으로 이루어진 4인 원정대 앞에는 얼어붙은 북극에 상존하는 난관이 끊임없이 괴롭혔다.

영하 50℃까지 떨어지는 강추위, 날카로운 빙탑과 얼음능선이 수십 수백 겹을 이룬 난빙대(亂氷帶·거대한 얼음판과 육지 또는 얼음판과 얼음판이 충돌하면서 거칠게 형성된 지역), 건너편 얼음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벌어진 리드(lead·얼음이 갈라지면서 드러난 바다), 초속 14m가 넘는 강풍 블리자드(blizzard), 한 치 앞을 파악할 수 없게 하는 화이트아웃(white out·옅은 안개가 끼면서 시야가 흐려지는 현상) 등이 번갈아가며 속출,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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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친 듯 불어대는 블리자드 속에서 전진하는 대원들. 사진에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대원들은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


지구 온난화로 북극해를 덮은 얼음이 얇아진 탓에 리드가 늘어나 도보로 탐험 가능한 기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은 해를 거듭할수록 희박해지는 상황이었다. 2003년 영국의 펜 하도가 북극점을 밟은 이후 지난해 6개 원정대가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93년에 이어 재도전에 나선 원정이기에 박 대장도 부담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몸담고 있는 영원무역을 비롯, LG화재, 엔씨소프트와 같은 큰 업체 외에도 여러 업체들이 원정 때마다 후원해 주었지만, 엄청난 경비가 들어가는 북극원정을 또다시 시도한다는 것은 거의 이루기 힘든 일. 그러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박 대장이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압박감은 점점 가중될 수밖에 없었고, 이미 40대를 넘어 그로서는 대원들에 비해 체력적인 한계가 빨리 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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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비행기가 워드헌터 산 앞에 내려놓은 바람에 북극해로 다가가기 위해 5시간 가까이 설원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북극의 빙원을 밟자마자 ‘다시 오면 개다’고 이빨을 물었을 만큼 지겹고 힘든 역경을 극복하고, 자신과의 조그마한 타협도 거부하며 한 발 한 발 극점으로 옮겨 도상거리 780km, 실제거리 2,000km에 이르는 북극 도보탐험을 끝내 해냈다. 현지시각 3월8일 오전 11시 캐나다 최북단 육지인 워드헌트를 출발한 지 53일 3시간15분만인 4월30일 오후 7시45분이었다.

“처절하고, 슬펐다. 그러나 이를 악물었다”

운행, 취사, 야영 장비와 식량을 실은 썰매의 무게는 100kg이 넘고, 그 썰매를 스키를 신은 채 끌어당기며 걸어야 하는 고행의 대장정인 북극 원정은 엉뚱한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항공사 사정과 날씨 때문에 예정보다 3일 늦은 3월9일 도보탐험에 나선 원정대는 경비행기가 엉뚱한 데 내려주는 바람에 실제 북극점 도보탐험의 기점인 워즈헌트山 능선 너머 얼음판으로 다가서기까지 5시간을 걸어야 했다.

최대 관건으로 삼은 난빙대는 이튿날부터 등장했다. 히말라야의 아이스폴 지대를 연상케 하는 난빙대의 어려움을 잘 아는 박 대장은 한숨부터 나왔다. 그러나 각오했던 일. 묵묵히 작은 봉우리 규모인 빙탑(氷塔) 사이를 파고들고, 대원들 역시 아무 말 없이 뒤따랐다. 커다란 얼음턱이 앞을 가로막으면 한 명이 턱 위로 올라서 잡아당기고, 나머지 대원들이 밀어 올려야만 무거운 썰매를 턱 위로 넘길 수 있었다. 턱 하나를 만날 때마다 이러한 과정을 네 번이나 반복해야만 모든 썰매를 이동시킬 수 있었다.

박 대장의 입에서는 ‘이 짓을 왜 하나? 이게 마지막이다, 두 번 다시 오면 개다’ 등 별별 욕이 다 나왔다. 간식을 먹기 위해 두 차례 멈춘 것 외에는 8시간 동안 계속 걸었건만, 둘쨋날 이동거리는 고작 6.1km. 이렇게 해서 언제 북극점까지 가나 하는 생각에 암담했다.

텐트를 치고 장비를 말리는데 덧옷 안감이 너무 두꺼워 마르지 않았다. 북극에서 젖은 상태로 지낸다는 것은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좁은 텐트 안에서 네 대원이 지내자니 잠이 제대로 올 리 만무.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 보면 하룻밤이 다 지나갔고, 그런 다음 텐트를 살펴보면 얼음 투성이였다. 텐트 안을 털어내면 3~5kg 무게의 얼음이 나왔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박 대장은 3일째 되는 날 텐트에 메스를 대 텐트 안주머니를 모두 잘라내 버렸다

리드는 북극점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내내 괴롭혔다. 둘째 날부터 나타난 리드는 썰매를 바닷물 위에 얹어놓고 올라타거나 스키로 건너뛰면서 통과하며 무사히 넘어가곤 했는데, 7일째 박 대장은 리드에 빠지고 말았다. 고무다리와도 같은 살얼음은 올라서면 “끽~, 끽~” 소리내며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그런 고무다리와도 같은 살얼음판을 밟고 두번째 리드를 통과한 다음 넓게 형성된 리드를 왼쪽으로 돌아가다 살짝 얼어붙은 리드에 올라서는 순간 살얼음은 늪처럼 푹 꺼져들었다.
얼음덩어리를 잡고 간신히 기어 나왔으나 이미 한쪽 신발이 짠 얼음물에 젖어들고 말았다. 신발이 문제가 아니라 동상이 문제였다. 때문에 서둘러 텐트를 치고, 버너를 켠 다음 옷을 벗고 침낭 속에 들어가 체온을 높이고 옷을 말려야 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한 명이라도 리드에 빠지면 운행은 몇 시간 동안 중단되고, 특히 오후에 대원 한 명이라도 리드에 빠지면 그 날 운행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박 대장은 첫 도전 때 리드에 빠져 텐트를 치고 하룻밤 묵고 났더니 이튿날 리드의 폭이 500m 이상 벌어져 네댓새동안 꼼짝 못하고 얼음이 얼어붙기를 기다렸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시 살짝 얼어붙은 얼음을 건너려다 얼음이 깨지면서 이번에는 가슴팍까지 빠져들었다. 악이 바쳤다. 또 다시 리드 도강을 강행했다. 박 대장은 결국 건너편 얼음 위에 올라섰다. 힘은 들었지만 전의를 불태울 수 있는 날이었다.

블리자드와 화이트아웃도 끊임없이 괴롭혔다. 밤새 블리자드가 불어댄 날이면 아침에 일어나서도 텐트 문을 열기가 겁났고, 화이트아웃이 시야를 가려 버리면 얼음판의 높낮이도 제대로 가늠되지 않아 툭하면 넘어지곤 해 짜증스럽고 진이 빠졌다. 더욱이 블리자드와 화이트아웃이 심한 날은 갈 길이 바쁜 원정대를 아예 꼼짝도 못하게 묶어 놓았다.

온도계의 하한선 눈금이 바닥칠 정도로 추운 날도 있었다. 적어도 영하 45℃ 이하로 내려간 날이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특히 리드에 빠졌나 나오면 곧바로 동태가 되고 말았다. 손발이 얼어붙고, 동상기가 느껴질 때면 처절했다. 너무도 슬펐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를 악 물고 또다시 극점을 향해 발을 옮겼다.

보름쯤 지나면서 박 대장은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힘이 들었다. 마흔둘이란 나이는 북극점 도전처럼 험난하고 오랜 기간이 걸리는 탐험을 하기에는 분명 늦은 나이였다. 대원들과 함께 타이어를 끌며 겨울 내내 강원도 산길을 누비며 체력강화훈련을 해왔지만, 나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쉬고 싶었다. 그렇지만 참았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는 순간 원정은 끝이었다. 동상으로 인한 손발의 통증도 느껴졌고, 눈꺼풀이 천근만근일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피할 곳이 전혀 없는 북극의 얼음바다에서 벗어나 마음놓고 지낼 수 있는 자유가 그리웠다.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매서운 강풍이 몰아치는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가야했다. 단 1%의 가능성만 남아 있더라도 가야한다는 생각에 극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식량과 연료 3분의 1 줄이고 마지막 스퍼트

계획대로 북위 85도를 넘어 베이스캠프에서 날아온 경비행기를 통해 400여kg의 보급품을 지원받은 3월30일, 베이스캠프에서 교신과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강동석 대원과 만날 때는 무척 반가웠으나, 경비행기가 하늘로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면 ‘나도 저 비행기를 탔으면’ 했다. 그래도 그 날은 모처럼 쾌적하고 배도 불린 날이었다. 3주동안 땀냄새와 발냄새에 쪄든 침낭과 의류를 몽땅 새 것으로 바꾸어 잠도 푹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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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얼어붙은 북극해에 설치한 텐트. 좁지만 유일한 휴식처였다. (우)운행 23일째인 3월30일 북위 85도의 설원에 내린 경비행기를 통해 중간 보급을 받았다.


원정대는 체력소모가 큰 극지탐험을 하면서도 하루에 두 끼만 먹었다. 아침저녁은 텐트에서 압력밥솥에 칼로리 높은 냉동건조식품을 뒤섞어 꿀꿀이죽 같은 잡탕밥과 멀건 국을 만들어 먹고, 낮에는 간식으로 초콜릿바와 파시코 영양음료 등을 두 차례 먹었다. 아침과 저녁은 좁더라도 바람을 피할 수 있는 텐트 안에서 해결했지만, 간식은 끝없는 빙원을 한 가운데서 선 채로 먹어야 했다. 북극의 바람은 수시로 변해 뒤돌아 앉아 있더라도 어느 샌가 얼굴로 바람이 들이쳤다. 그 때마다 앉은 몸을 이리저리 돌리려면 그것 또한 고통. 그래서 움직이기 쉽게 서서 먹은 것이다.

대원들 모두 양에 관한 한 둘째라면 서러워할 만큼 대식가들. 당연히 한정된 식량과 간식으로는 배를 불릴 수 없었다. 아침저녁마다 압력밥솥이 긁어대 설거지를 할 수도 없지만 따로 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뭔가 모자르다 싶을 때마다 나누는 대원들의 대화 내용도 먹거리였다. 자장면, 생선회, 보신탕, 닭한마리 등등, 알고 있는 음식 메뉴란 메뉴는 몽땅 늘어놓고 귀국하면 무엇부터 먹을까 하고 고민하곤 했다.

그런데, 박 대장은 보급받은 지 며칠 지나지 않은 4월2일 아침 대원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하는 결정을 내렸다. 짐에 치어 속도가 늦어지면 얼음이 녹기 전에 북극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판단에 식량은 2일치를 3일에 나누어 먹고, 연료는 300cc씩 줄이기로 했다. 그밖의 식량과 연료는 몽땅 자루에 담고 빨간 리본을 매달아 얼음언덕 위에 올려놓았다. 다른 탐험대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눈에 띄게 해놓은 것.
베이스캠프의 숙소 주인에게서 빌려온 총까지도 버릴 생각을 했다.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14개 거봉을 완등하고, 3극점 도전에 나섰던 이탈리아의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61)는 두번째 북극점 도보탐험 도전은 밤낮 가리지 않고 여러 날 좇아다니는 북극곰의 위협 때문에 포기했다. 그만큼 북극곰은 북극점 탐험을 방해하는 위협적인 존재다. 그래서 모든 원정대는 베이스캠프를 출발할 때 총을 휴대한다. 그렇지만 박 대장은 극점 도달을 위해 곰의 위협도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베이스캠프와의 교신 결과 일단 휴대한 총은 버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대원들은 200g에서 절반 가까이 줄어든 분량으로 한 끼를 해결하고 연료를 줄이느라 차가운 텐트 안에서 지내야 했다 하지만, 조금도 전의를 잃지 않았다.

특히 42일째인 4월18일에는 하루 운행을 끝낸 다음 텐트를 치고, 베이스캠프와 무전교신에서 이튿날 아침부터 블리자드가 불어댈 것 같다는 일기예보를 받곤, 밤 10시부터 다시 극점을 향해 나아갔다. 이튿날은 분명 꼼짝없이 텐트에 갇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날이 좋을 때 조금이라도 더 걷자는 생각에서였다. 그 날 밤 따라 초반부터 난빙대가 앞을 가로막고, 리드까지 나타나 애를 먹였다. 하지만 박영석 대장은 빙탑 사이를 빠져나가고, 썰매를 연결해 살얼음 같은 얼음을 깨면서 앞으로 전진, 결국 극점에 한 발 더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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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홍성택, 오희준, 정찬일, 강동석 대원.
어려움 속에서도 박영석 대장은 동료애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4월21일은 홍성택 대원의 생일이었다. 박 대장은 20여 일간 감춰둔 맥주와 과일을 내놓았다. 북위 88도에서였다. 맥주와 신선한 과일이라니, 비록 꽁꽁 얼었지만 대원들은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미니 핫케익에 성냥 4개를 꽂아 생일 케익으로 대신 사용하고 축하 노래까지 불러주며 대원들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원정대는 한 발 한 발 극점으로 다가갔지만 제 아무리 열심히 걷더라도 그들이 올라탄 유빙이 뒤로 밀려가면 모든 게 물거품이었다. 하루 온종일 걸었는데, 뒤로 밀리는 바람에 극점까지의 거리가 다시 멀어지고, 텐트 안에 앉아 있는 사이 유빙이 밀려나면서 또다시 멀어졌다. 4월16일에는 13km나 뒤로 밀려나고, 그로 인해 북위 87도를 두 차례나 넘어서야 했다. 박 대장은 북극의 여신께 빌고 빌었다. 제발 우리들의 꿈을 이루게 해달라고-.

난빙에서 헤매고, 리드에 빠지고, 유빙에 밀리는 고행은 매일매일 반복되었다. 그러나 GPS의 계기판은 점점 90도에 다가서고 있었다. 4월26일 꿈에 그리던 북위 89도를 넘어서고, 4월29일에는 홍성택 대원이 리드에 빠지자 급히 텐트를 치고 옷을 말린 다음 또다시 밀어붙였다. 이후 몇 시간 동안은 바람이 이들을 도와주었다. 동쪽으로 진행하는 대원들의 뒤로 북서풍이 불어왔다. 북극의 여신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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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점에서 태극기와 협찬사 깃발을 날리는 대원들. 왼쪽부터 오희준,박영석,정찬일 대원.
‘드디어 마지막 별을 따냈다’

이튿날 원정대는 북위 89°59′997, 59′998을 지나 드디어 GPS의 계기판이 ‘북위 90°00′000’을 가리키는 지점에 올라섰다. 결국 박영석 대장은 예정일보다 6일 앞선 4월30일 오후 7시45분 북위 90도 북극점에 도달, 산악그랜드슬램의 마지막 별을 따냈다. 그리고 94년 남극점 도달, 95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이어 북극점 도달에 성공한 홍성택 대원도 세계에서 15번째로 지구 3극점 등정자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그 날까지 54일간의 탐험을 작은 노트에 빼곡히 써오던 박영석 대장은 북극점 위에 구축한 텐트에 들어서서 마지막 장을 펼쳤다. 손이 떨렸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쓸 수 있는 문장은 단 한 줄, ‘드디어 별을 따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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