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인(宇天 許萬壽)
페이지 정보
본문
산이 좋아 처자식도 버리고 홀로 산속에 들어가 원시인처럼 살았던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님. '지리산신령' 또는 '산사람'으로 더 알려졌던 우천님은 산다기보다 인적도 드문 깊은 산속에서 산짐승처럼 야생했었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세석산장이 없었을 때 옛날의 산장 자리에 토담집 한 채가 있었다. 어느시골집의 헛간 같았던 그곳이 허씨의 보금자리였다. 허씨는 흘러가는 구름, 피고 지는 고산식물의 꽃, 속삭이는 솔바람을 벗삼아 살아 갔었다. 인정많은 등산객이라도 찾아들지 않으면 나무열매, 산나물로 배를 채우며 살았었다. 그러나 허씨는 세상에 이 생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했었다. 허씨가 처음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일정때 일본 입명관(入命館) 중학시절, 당시 그 학교에는 '동정(童貞)클럽' 이라는 등산클럽이 있었다. 회원 모두가 산을 즐기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렸을적부터 산을 좋아했던 허씨는 등산반에 가입하고부터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했었다.
공부보다 산을 더좋아 했던 허씨는 중학교는 그럭저럭 마쳤지만 대학진학이 문제였다. 산에 빠진 허씨가 대학진학을 포기하자 부모들은 결혼을 시키면 아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하고 허씨가 22살 되던 해에 일시 귀국시켜 고향 진주에서 강제로 장가를 보냈었다. 허씨는 부인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경도 전문학교를 졸업했으나 산으로 향한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었다. "산의 향수때문에 신혼의 달콤한 꿈도 몰랐었다."는 것이 당시 허씨의 회고담이었다. 나이 29살 때 해방을 맞은 허씨 일가족은 귀국했었다. 부인과 딸셋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온 허씨는 진주에 '대동'이란 서점을 냈다. 2년동안 그럭저럭 서점을 꾸려 갔으나 산에만 정신이 팔린 그의 서점이 잘 될리가 없었다. 서점의 문을 닫아 홀가분해진 허씨는 가족을 돌볼 틈도 없이 산에 미치기 시작했다. 31살이던 허씨는 어느 가을 , 산을 잊어 달라는 부인의 애원도 뿌리치고 허씨는 영영 집을 떠났다. 그가 처음 찾아간 산은 경남 의령의 자굴산으로 해발 1천미터 가까운 산중턱 양지바른곳에 땅굴을 파고 풀을 엮어 바닥에 깔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의 생활은 원시인 그대로였다고 한다. 자굴산에서 지낸지 2년만에 지리산 세석평전으로 자리를 옮겨 토담움막을 세웠다.
집을 나선지 4년째 되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부인이 불쑥 이 토담집에 찾아왔었다. 부인은 3일동안 허씨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허씨는 '나는 이미 산에 바친몸이니 단념하라'고 완강히 거부하여 부인은 허씨에 대한 하산설득을 포기하고 혼자 산을 내려왔다는 것이다. 허씨는 지리산에 사는 동안 주능을 비롯한 곳곳의 샘터 10여개를 찾아냈는가 하면몇푼 생길 때마다 그돈으로 안내판까지 만들어 붙였었다. 줄잡아 7만여명의 등산객을 안내했던 허씨는 "지리산에 살다 지리산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고 한다. 그는 1976년 6월 어느날 지리산에서 홀연 사라졌었다. 그후 어느 등산인은 팔공산에서 허씨를 보았다고 했지만 지리산에서는 물론 전국의 어느산에서도 허씨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허씨는 평소 말했던것처럼 지리산 어느곳에 마련된 그의 안식처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리산에서 허씨와 수많은 산 이야기를 나누었던 산악인들은 그를 잊지 못해 중산리 등산로 입구에 그의 추념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이 행적을 적어 놓았다.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에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 사람들이 일러 산사람이라 했던 그분 우천 허만수님은 1916년 진주시 옥동봉 태생으로 일본 경도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재학시 이미 산을 가까이 하고자하는 열정이 유달랐던 분이다. 님은 산살이의 꿈을 이루고자 40여세에 지리산에 들어와 가없는 신비에 기대 지내며 산을 찾는이를 위해 등산로 지도를 만들어 나누어 주기도 하고 대피소나 이정표지판을 세우기도 하고, 인명 구조에 필요한 데는 다리를 놓는등 자연을 진실로 알고 사랑하는이 만이 해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길을 개척해 보였다. 조난자를 찾아 헤매기 20여년.. 조난직전에 사람들을 구출하거나 목숨을 잃은이의 시신을 찾아 집으로 돌려 보내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안전하게 옮겨 치료한일 헤아릴 수 없으며, 지리산 발치의 고아들에게 식량을 대어 주고 걸인들에게는 노자를 보태어 준 일 또한 이루 헤아릴길 없으니, 위대한 자연에 위대한 품성 있음을 미루어 알 게 되지 않은가?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을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 대로 몸에 베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었으니, 풀 한포기 돌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와 한 일이나, 산짐승을 잡아가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되돌려 받아 방생 또는 매장한 일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 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가까운 이들과 따님 덕임의 말을 들으면 숨을 거둔곳이 칠선계곡일 것이라 하는 바, 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빛으로 피어오르는 듯하다.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智異 대자연 속으로 떠난 "인간 산신령"
홀연히 종적 감춰 "入神 20년"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인 1976년 6월 어느 날, 지리산 최초의 인간 산신령, 또는 지리산 산신령으로 불렸던 우천(宇天) 허만수(許萬壽)선생이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김없이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따라 좋아하던 산, 지리산에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한 떨기 산야초처럼 살았던 그가 아무도 모르는 지리산 어느 언저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지 어언 20년이 지났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96년 6월 2일 제 25회 지리산 철쭉제 폐막식이 열린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봉으로 향하는 등산로 입구 그의 추모비 앞에 모인 수많은 산악인들은 20년 전 홀연히 지리산에서 자취를 감춘 선배 산악인의 뜻을 기렸다. 76년 6월 그가 사라진 이후 그를 추앙하던 수많은 산꾼들은 이곳에다 "산을 위해 태어난 산사람 우천 허만수 추모비"를 세워 놓고 해마다 그가 사라진 6월 계곡의 철쭉꽃이 피어오를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추모의 염을 되새겨오고 있다.
생전 그의 별명처럼 산신령이 되어 지리산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일만큼 그를 아는 수많은 산꾼들은 그의 증발을 입신(入神)의 경지로 주저 없이 받아들인다. 우천의 입신 20주기를 맞이한 올해 철쭉제 마지막 행사인 우천 추모식장에는 그의 유일한 피붙이인 딸 덕임씨(진주 한평초등학교 교사)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산을 위해 산에서 살다가 산에서 떠나가신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한없이 북받치는 듯 하염없는 눈물을 뿌려 보는 이들을 숙연케 했다. "그 누가 무어라 해도 당신만큼 지리산을 사랑했던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며 끝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말로써 잇지 못했다.
그리고 이날 우천 선생의 뜻깊은 추모식을 맞아 진주에서 화실을 경영하는 이길성씨(65)가 참석, 우천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며 우천이 생전에 제작한 지리산 등산안내도를 처음으로 공개해 관심을 끌었다. 철쭉제를 주관하는 진주산악회에 기증된 허우천의 지리산 등산안내도는 20여 년 전인 73년도에 제작된 것으로 오늘날 지리산 등산로의 모태가 된 뜻깊은 것이다. 우천이 지리산을 누비며 구석구석의 등산로를 직접 개척하거나 대피소와 이정표 표지판을 세우고 위험한 곳에는 안전시설물을 설치하는 등 초인적인 의지와 집념을 발휘해 만든 것이 바로 이번에 공개된 지리산 등산안내도 이다.
이 지리산 등산 안내도는 73년 4월 5일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30원에 판매된 것을 뜻하는 가격 표시가 있는데 양면으로 석판인쇄 된 것이다. 진주산악회 한동렬회장(64)은 "당시 이 등산안내도를 제작하면서 우천이 직접 등산로를 만들어 그린 것인데 인쇄는 지금은 없어진 진주시 본성동 옛 경남일보사 맞은편 문화석판사에서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며 "오늘날 모든 지리산 등산안내지도는 우천이 직접 등산로를 개척, 제작한 이 안내도에 의한 것이다."고 말했다. 등산안내도 뒷면에는 "바위, 폭포, 수목을 진심으로 수호함이 산악인의 자연을 순수하게 사랑함이요, 진실한 미덕이고 숭고한 정서일 것이다. 이것이 곧 산악인의 윤리일 진 져."라며 모름지기 산악인의 자세란 어떤 것인지를 일찍이 피력해 그의 자연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또 등산코스를 안내하면서 ①∼⑤코스까지 상세하게 소개해 놓고 있다.
①코스는 중산리∼칼바위∼법계사∼천왕봉∼통천문∼장터목∼제석당∼하동바위∼백무동∼덕전∼마천 (1박2일: 법계사 1박) 구간을 상세하게 안내하고 구간별 거리까지 명기해 놓아 등산객의 편의를 도모해 주었다.
②코스는 중산리∼천왕봉∼대원사 구간을 말하는데 이들 ①, ②코스는 천왕봉을 최단거리로 오를 수 있으며 특히 ②코스의 써리봉은 웅장하고 험악한 암벽이 펼쳐져 지리산의 천봉만학을 볼 수 있다고 곁들여 소개했다.
③코스는 쌍계사∼대성동∼세석∼천왕봉∼대원사로 유명사찰과 천연공원을 관람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④코스는 마천∼백무동∼장터목∼천왕봉∼장터목∼세석∼대성동∼쌍계사 구간으로 전남북지방에서 쉽게 등반할 수 있는 코스라고 안내했다.
⑤코스는 화엄사∼노고단∼세석∼천왕봉∼칠선계곡∼의탄∼마천구간으로 소개했는데 지리산 등반의 최장거리로 58km로서 4박5일의 기간이 소요되는 지리산 종주등반코스라고 할 만 하다고 했다.
특히 이 안내도에는 5가지 등산코스와 함께 2가지의 특수등반로를 소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첫 번째 특수등산로는 중산리∼칼바위∼남부암벽 특수등반로∼천왕봉 구간으로 표시했는데 여기서 남부암벽 특수등반로는 홈바위를 지나서 계곡(통신골)을 따라 8km의 험준한 등반로라고 소개했다. 두 번째 특수등반로는 쌍계사∼버드내재∼삼신봉∼세석을 말하는데 이 등반로는 숲이 많이 우거져 특별한 지형의 지식이 없으면 길을 찾기 힘들다고 표시해 놓았다. 당시 제작된 등산안내도의 등산로와 오늘날 그것과는 매우 유사한데 다만 교통발달과 더불어 등반일정만 다소 차이가 날 뿐이다. 오히려 지금은 폐쇄된 등반로까지 당시 지도에 표시된 곳이 곳곳에 눈에 띄기도 한다.
허우천은 당시 이 등산안내도를 제작, 판매한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을 정도로 어려운 산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이 등산안내도가 제작된 지 3년여 후 허우천은 지리 영봉 그 천고의 신비 속으로 승화했다. 아무도 그가 어떻게 어디서 정확하게 언제 증발했는지를 알지 못하게 한 채로 그는 자연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중산리에 세워진 그의 추모비 마지막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꽃으로 피어오르는 듯 하다.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게 하는 바이다. 우천의 자연으로의 동화 20주년을 맞이한 이 즈음 그의 남다른 지리산 사랑을 되새길 수 있는 뜻깊은 추모제라도 한번쯤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중기님 글
공부보다 산을 더좋아 했던 허씨는 중학교는 그럭저럭 마쳤지만 대학진학이 문제였다. 산에 빠진 허씨가 대학진학을 포기하자 부모들은 결혼을 시키면 아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하고 허씨가 22살 되던 해에 일시 귀국시켜 고향 진주에서 강제로 장가를 보냈었다. 허씨는 부인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경도 전문학교를 졸업했으나 산으로 향한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었다. "산의 향수때문에 신혼의 달콤한 꿈도 몰랐었다."는 것이 당시 허씨의 회고담이었다. 나이 29살 때 해방을 맞은 허씨 일가족은 귀국했었다. 부인과 딸셋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온 허씨는 진주에 '대동'이란 서점을 냈다. 2년동안 그럭저럭 서점을 꾸려 갔으나 산에만 정신이 팔린 그의 서점이 잘 될리가 없었다. 서점의 문을 닫아 홀가분해진 허씨는 가족을 돌볼 틈도 없이 산에 미치기 시작했다. 31살이던 허씨는 어느 가을 , 산을 잊어 달라는 부인의 애원도 뿌리치고 허씨는 영영 집을 떠났다. 그가 처음 찾아간 산은 경남 의령의 자굴산으로 해발 1천미터 가까운 산중턱 양지바른곳에 땅굴을 파고 풀을 엮어 바닥에 깔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의 생활은 원시인 그대로였다고 한다. 자굴산에서 지낸지 2년만에 지리산 세석평전으로 자리를 옮겨 토담움막을 세웠다.
집을 나선지 4년째 되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부인이 불쑥 이 토담집에 찾아왔었다. 부인은 3일동안 허씨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허씨는 '나는 이미 산에 바친몸이니 단념하라'고 완강히 거부하여 부인은 허씨에 대한 하산설득을 포기하고 혼자 산을 내려왔다는 것이다. 허씨는 지리산에 사는 동안 주능을 비롯한 곳곳의 샘터 10여개를 찾아냈는가 하면몇푼 생길 때마다 그돈으로 안내판까지 만들어 붙였었다. 줄잡아 7만여명의 등산객을 안내했던 허씨는 "지리산에 살다 지리산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고 한다. 그는 1976년 6월 어느날 지리산에서 홀연 사라졌었다. 그후 어느 등산인은 팔공산에서 허씨를 보았다고 했지만 지리산에서는 물론 전국의 어느산에서도 허씨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허씨는 평소 말했던것처럼 지리산 어느곳에 마련된 그의 안식처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리산에서 허씨와 수많은 산 이야기를 나누었던 산악인들은 그를 잊지 못해 중산리 등산로 입구에 그의 추념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이 행적을 적어 놓았다.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에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 사람들이 일러 산사람이라 했던 그분 우천 허만수님은 1916년 진주시 옥동봉 태생으로 일본 경도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재학시 이미 산을 가까이 하고자하는 열정이 유달랐던 분이다. 님은 산살이의 꿈을 이루고자 40여세에 지리산에 들어와 가없는 신비에 기대 지내며 산을 찾는이를 위해 등산로 지도를 만들어 나누어 주기도 하고 대피소나 이정표지판을 세우기도 하고, 인명 구조에 필요한 데는 다리를 놓는등 자연을 진실로 알고 사랑하는이 만이 해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길을 개척해 보였다. 조난자를 찾아 헤매기 20여년.. 조난직전에 사람들을 구출하거나 목숨을 잃은이의 시신을 찾아 집으로 돌려 보내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안전하게 옮겨 치료한일 헤아릴 수 없으며, 지리산 발치의 고아들에게 식량을 대어 주고 걸인들에게는 노자를 보태어 준 일 또한 이루 헤아릴길 없으니, 위대한 자연에 위대한 품성 있음을 미루어 알 게 되지 않은가?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을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 대로 몸에 베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었으니, 풀 한포기 돌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와 한 일이나, 산짐승을 잡아가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되돌려 받아 방생 또는 매장한 일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 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가까운 이들과 따님 덕임의 말을 들으면 숨을 거둔곳이 칠선계곡일 것이라 하는 바, 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빛으로 피어오르는 듯하다.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智異 대자연 속으로 떠난 "인간 산신령"
홀연히 종적 감춰 "入神 20년"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인 1976년 6월 어느 날, 지리산 최초의 인간 산신령, 또는 지리산 산신령으로 불렸던 우천(宇天) 허만수(許萬壽)선생이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김없이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따라 좋아하던 산, 지리산에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한 떨기 산야초처럼 살았던 그가 아무도 모르는 지리산 어느 언저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지 어언 20년이 지났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96년 6월 2일 제 25회 지리산 철쭉제 폐막식이 열린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봉으로 향하는 등산로 입구 그의 추모비 앞에 모인 수많은 산악인들은 20년 전 홀연히 지리산에서 자취를 감춘 선배 산악인의 뜻을 기렸다. 76년 6월 그가 사라진 이후 그를 추앙하던 수많은 산꾼들은 이곳에다 "산을 위해 태어난 산사람 우천 허만수 추모비"를 세워 놓고 해마다 그가 사라진 6월 계곡의 철쭉꽃이 피어오를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추모의 염을 되새겨오고 있다.
생전 그의 별명처럼 산신령이 되어 지리산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일만큼 그를 아는 수많은 산꾼들은 그의 증발을 입신(入神)의 경지로 주저 없이 받아들인다. 우천의 입신 20주기를 맞이한 올해 철쭉제 마지막 행사인 우천 추모식장에는 그의 유일한 피붙이인 딸 덕임씨(진주 한평초등학교 교사)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산을 위해 산에서 살다가 산에서 떠나가신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한없이 북받치는 듯 하염없는 눈물을 뿌려 보는 이들을 숙연케 했다. "그 누가 무어라 해도 당신만큼 지리산을 사랑했던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며 끝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말로써 잇지 못했다.
그리고 이날 우천 선생의 뜻깊은 추모식을 맞아 진주에서 화실을 경영하는 이길성씨(65)가 참석, 우천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며 우천이 생전에 제작한 지리산 등산안내도를 처음으로 공개해 관심을 끌었다. 철쭉제를 주관하는 진주산악회에 기증된 허우천의 지리산 등산안내도는 20여 년 전인 73년도에 제작된 것으로 오늘날 지리산 등산로의 모태가 된 뜻깊은 것이다. 우천이 지리산을 누비며 구석구석의 등산로를 직접 개척하거나 대피소와 이정표 표지판을 세우고 위험한 곳에는 안전시설물을 설치하는 등 초인적인 의지와 집념을 발휘해 만든 것이 바로 이번에 공개된 지리산 등산안내도 이다.
이 지리산 등산 안내도는 73년 4월 5일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30원에 판매된 것을 뜻하는 가격 표시가 있는데 양면으로 석판인쇄 된 것이다. 진주산악회 한동렬회장(64)은 "당시 이 등산안내도를 제작하면서 우천이 직접 등산로를 만들어 그린 것인데 인쇄는 지금은 없어진 진주시 본성동 옛 경남일보사 맞은편 문화석판사에서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며 "오늘날 모든 지리산 등산안내지도는 우천이 직접 등산로를 개척, 제작한 이 안내도에 의한 것이다."고 말했다. 등산안내도 뒷면에는 "바위, 폭포, 수목을 진심으로 수호함이 산악인의 자연을 순수하게 사랑함이요, 진실한 미덕이고 숭고한 정서일 것이다. 이것이 곧 산악인의 윤리일 진 져."라며 모름지기 산악인의 자세란 어떤 것인지를 일찍이 피력해 그의 자연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또 등산코스를 안내하면서 ①∼⑤코스까지 상세하게 소개해 놓고 있다.
①코스는 중산리∼칼바위∼법계사∼천왕봉∼통천문∼장터목∼제석당∼하동바위∼백무동∼덕전∼마천 (1박2일: 법계사 1박) 구간을 상세하게 안내하고 구간별 거리까지 명기해 놓아 등산객의 편의를 도모해 주었다.
②코스는 중산리∼천왕봉∼대원사 구간을 말하는데 이들 ①, ②코스는 천왕봉을 최단거리로 오를 수 있으며 특히 ②코스의 써리봉은 웅장하고 험악한 암벽이 펼쳐져 지리산의 천봉만학을 볼 수 있다고 곁들여 소개했다.
③코스는 쌍계사∼대성동∼세석∼천왕봉∼대원사로 유명사찰과 천연공원을 관람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④코스는 마천∼백무동∼장터목∼천왕봉∼장터목∼세석∼대성동∼쌍계사 구간으로 전남북지방에서 쉽게 등반할 수 있는 코스라고 안내했다.
⑤코스는 화엄사∼노고단∼세석∼천왕봉∼칠선계곡∼의탄∼마천구간으로 소개했는데 지리산 등반의 최장거리로 58km로서 4박5일의 기간이 소요되는 지리산 종주등반코스라고 할 만 하다고 했다.
특히 이 안내도에는 5가지 등산코스와 함께 2가지의 특수등반로를 소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첫 번째 특수등산로는 중산리∼칼바위∼남부암벽 특수등반로∼천왕봉 구간으로 표시했는데 여기서 남부암벽 특수등반로는 홈바위를 지나서 계곡(통신골)을 따라 8km의 험준한 등반로라고 소개했다. 두 번째 특수등반로는 쌍계사∼버드내재∼삼신봉∼세석을 말하는데 이 등반로는 숲이 많이 우거져 특별한 지형의 지식이 없으면 길을 찾기 힘들다고 표시해 놓았다. 당시 제작된 등산안내도의 등산로와 오늘날 그것과는 매우 유사한데 다만 교통발달과 더불어 등반일정만 다소 차이가 날 뿐이다. 오히려 지금은 폐쇄된 등반로까지 당시 지도에 표시된 곳이 곳곳에 눈에 띄기도 한다.
허우천은 당시 이 등산안내도를 제작, 판매한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을 정도로 어려운 산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이 등산안내도가 제작된 지 3년여 후 허우천은 지리 영봉 그 천고의 신비 속으로 승화했다. 아무도 그가 어떻게 어디서 정확하게 언제 증발했는지를 알지 못하게 한 채로 그는 자연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중산리에 세워진 그의 추모비 마지막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꽃으로 피어오르는 듯 하다.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게 하는 바이다. 우천의 자연으로의 동화 20주년을 맞이한 이 즈음 그의 남다른 지리산 사랑을 되새길 수 있는 뜻깊은 추모제라도 한번쯤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중기님 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