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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士에게 듣는 山이야기] 정신과의사 이근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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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산정인 이름으로 검색 작성자 산정인 이름으로 검색
댓글 2건 조회 3,390회 작성일 2005-02-04 18: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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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의 교감 통해 주체성 확대해나갈 수 있습니다”

네팔은 등산가들에게나 여행가들에게나 인상 깊은 곳이다. 신령스럽기까지 한 고봉들이 즐비하게 솟아 있고, 상상도 할 수 없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네팔인들을 통해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순수함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그래서 네팔을 찾았던 이들 대부분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찾아가곤 하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 이근후 박사(70?가족아카데미 이사장)는 히말라야는 물론, 문화 예술 종교에 이르기까지 네팔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산악인이다. 그는 82년 네팔에 첫 발을 디딘 이후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30회 가까이 네팔을 방문해왔다. 오는 2월3일에도 10박11일 일정의 네팔문화 탐방길에 오른다. 늘 해왔듯이 이틀간은 카트만두에서 간질환자들을 돌볼 계획이다.

봉사로 일관된 삶 살아온 원로산악인

예년과 달리 마른 겨울이 지속되면서 등산인들이 그리워하던 흰 눈이 북한산을 하얗게 덮은 1월16일 오전, 이근후 박사는 맏딸 영주씨(가정의학 전문의), 둘째 딸의 맏아들인 최솔군(초교 5년)과 함께 북한산 구기동계곡으로 들어섰다. 구기동계곡은 일요일을 맞아 눈 구경 온 등산인들로 명절을 앞둔 시장통처럼 붐볐다.

주치의나 다름없는 맏딸 영주씨는 왼쪽 눈의 시력을 잃어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아버지가 미끄러운 바위를 디딜 때마다 “조심하세요”라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뒤를 따라붙었다. 이 박사는 2003년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 눈이 답답함을 느껴 귀국 후 병원을 찾았으나 눈 혈관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끝내 왼쪽 눈의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 일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눈을 진찰하는 사이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서둘러 심근경색 수술을 해 위험한 상황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근후 박사는 얼음이 덮여 미끄러운 계곡길을 걸으면서도 편안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러다 산길 옆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를 갖는 게 가장 중요하고,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즐겁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년을 맞아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태백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한강을 거쳐 서해로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서해로 스며드는 상황에서 상류에 머물러 있겠다고 하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저는 늘 지금 현재 상황이 내 인생에 황금기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가면서 즐겁게 사는 게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흰 눈 덮인 구기동계곡에서 맏딸 영주씨. 손자 솔군과 담소를 나누는 이근후 박사.
그는 보육원 원아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도 오랜 세월 노력해왔다. 1995년 회갑을 맞아 가족아카데미를 창립하고 20년 가까이 살아온 삼청동 집을 사무실로 쓰고 있는 것도 봉사활동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다. ‘건강한 가족, 건강한 사회’라는 기치를 걸고, 연구조사팀, 사이버교육?상담팀, 사회교육팀,

사회봉사팀, 멀티미디어팀 5개 위원회로 나뉘어 운영되는 가족아카데미에서 이 박사는 이사장, 200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서 정년퇴임한 아내 이동원 교수는 원장을 맡고, 결혼한 2남2녀 부부 모두 자기 분야에 맞는 위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물론 많은 전문가들이 각 분야에서 봉사하고 있다.

구기분소를 지나 승가사 갈림목 쉼터 의자에 앉자마자 이 박사는 “요즘은 꼭 필요한 기간 외에는 카트만두에 머물지 않지만, 처음 네팔을 방문했을 때는 가로등도 신호등도 없을 만큼 정말 지낼 만한 곳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박사는 피란 시절 변완철, 배석규, 고한식씨 같은 한국산악회의 전설적인 산악인들에게 전문등반을 배울 기회도 가졌고, 경북대 의대 본과 1학년 때인 57년에는 경북학생학악연맹 창립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던 원로 산악인이다.

“6?25동란 막바지였던 중학교 시절 교장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힐라리라는 사람이 세계 최고봉을 올랐는데, 너희들도 그런 기개를 배워 꼭 세계 최고봉을 올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 분이 제게 산을 심어준 첫 어른이셨던 셈이죠.

아무튼 제가 산에 다닐 때는 등산화는 영국 군화, 겨울 복장으로는 하얀 스키복을 최고로 치던 시절이었습니다. 골판지에 그려 만든 본을 대장간에 가져가 쇠를 달구고 두들겨 아이젠을 만들기도 했고요. 빨치산 아지트가 남아 있던 58년에는 군용트럭 타고 함양까지 간 다음 경찰들이 앞장서 눈길을 뚫어주는 가운데 지리산 적설기 산행도 했답니다.”

흰 산에 꿈을 꾸어오던 그는 67년 연맹 창립 10주년을 맞아 히말라야 로체샤르(8,400m) 원정을 목표로 세우고 그에 앞서 일본 북알프스 동계원정까지 다녀왔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 승가사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바라보고 있는 한국석불문화연구회.
“로체샤르 원정 무산 이후 바삐 사느라 산을 접어두고 있었는데, 82년 마칼루 원정 참가 제의가 오지 뭐예요. 팀닥터를 맡으라면서 말입니다. 히말라야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싶었지만 베이스캠프에 묶여 있다 올 것 같아 학술대원을 하겠다 했죠. 마침 문교부에서 예산을 지원하게 되어 있었기에 학술조사

를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했으니까요. 그 때 한 6개월간 네팔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답니다. 쿰중의 힐라리병원도 방문하고, 루클라로 내졀〈 중 만난 힐라리에게 마침 주머니에 있던 100달러 중 50달러를 병원을 유지하는 데 쓰라고 건네주기도 했고요.”

당시 그의 가이드나 다름없는 셰르파는 그의 고향인 돌카 지역을 안내했다. 거기서 그는 흰 산만큼이나 맑은 영혼을 가진 네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데 대단한 병도 아닌데 약이 없어 치료하지 못하고 지내는 이들을 보곤 무척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귀국 후 한국간질협회(장미회)의 도움을 받아 84년부터 3년간

매년 1,000여 명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약품을 보냈다. 89년부터는 당시 몸을 담고 있던 이화여대 부속병원 의사와 이대생들로 구성된 이화의료봉사단을 결성해 매년 네팔을 방문해 치료도 해주고, 병원도 지어주었다. 이 박사는 의료봉사활동을 정년퇴임 이듬해인 2002년까지 해왔다.

이 박사의 봉사정신은 단지 네팔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의 머리 속에는 남을 위해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 어머니께서 병을 몸에 달고 사실 정도로 수시로 아프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너무 아파하시기에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조수는 지금 의사가 없다며 왕진을 거부하지 뭡니까. 뻔히 있는 줄 알고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병원 문을 나서면서 결심했죠. 꼭 의사가 되어 환자가 부르기만 하면 언제 어디든 달려가겠다고.”

경북대 의대 입학으로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한 그는 이미 학창시절 산이 인간의 정신을 맑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문에 팔공산 기슭에 병원을 지어놓고, 환자들과 팔공산 동봉을 오르내리면 특별한 약물의 도움 없이도 치료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요즘 그는, 1년에 두 차례 이상 입원하던 환자들을 가끔 만나 담소를 나누다 병원 부근의 삼청공원을 산책한 다음 점심을 먹는 것으로 치료를 끝내는데, “그 환자들은 입원하는 일이 없이 지낸다”고 말한다.

원아 돌보기도 이미 어린 시절 마음먹은 것이다. 중학교 시절 피란 도중 혈혈단신이 된 광명보육원생들의 참담한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후 70년 군의관시절 근무지 가까이에 어린 시절 인연 맺은 광명보육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매주 토요일마다 보육원을 찾아 아이들과 함께 지내왔다. 95년에는 가족아카데미 내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무하문화사랑방을 만들어 음악 미술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원생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데 노력하고 있다. 보육원 내의 무하문화사랑방은 이 박사가 자비로 만든 공간이다.

결혼한 2남2녀 가족과 한 지붕 아래 살아

▲ 정년퇴임 후 공동대표로 가족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 이근후-이동원씨 부부.
이 박사는 두 아들과 두 딸 내외와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다. 이 날 동행한 맏딸 부부도 마찬가지다. 이는 나이 드신 부모를 자식 모두의 힘으로 모시겠다는 맏아들의 의사에 다른 형제들이 따른 결과다. 이렇게 해서 2003년 새로 지은 구기동 집에 들어갈 때 가장 신경써서 장만한 게 대형 TV와 펜티엄급 컴퓨터였다고 한다.

“자식들과 함께 살지만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철저하게 지킨답니다. 각자 살집은 각자 용도에 맞게 설계했고요. 단지 우리 부부에게 편한 게 있다면 밥은 큰아들집에서 해결할 수 있고, 토요일이면 네 집 중 한 집이 외식을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죠. 아파트 관리비 대신 부모 공양비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대형 TV는 내 발로 가지 못할 때 흔들의자에 앉아 옛날 모습을 찍어놓은 히말라야를 보려고 큰 맘 먹고 산 겁니다. 컴퓨터는 함께 사는 자식들의 아이들을 내 집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고요. 오늘도 산행 마치고 PC방 가기로 약속하고 솔이를 데려왔답니다.”

이 박사네 온 가족은 네팔 트레킹 경험이 있다. 솔이는 5살 때 랑탕 트레킹을 했다. 이 박사는 “어려서부터 하도 산에 데리고 다닌 탓인지 큰딸은 제주도에 한라산만 없다면 좋겠다고 말하곤 한다”고 농담 삼아 말했다.

“할아버지, 얼마나 더 가야해요?”
“저 모퉁이만 돌면 된다.”

승가사 진입로로 올라서기 전 지루했던지 솔이가 할아버지에게 남은 거리를 물었다. 그러자 맏딸 영주씨는 “산사람 말은 절대 믿으면 안 된다”고 조카에게 충고해준다. 아버지 따라 다니면서 체득한 경험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승가사 샘에 도착하자 한국석불문화연구회 회원들이 한 명 한 명 올라왔다. 이 연구회는 사람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석불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에 86년 만든 모임이다.

“사람의 심리를 연구하는 의학도로서 우리 민족의 정서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화, 벽화 등 어떤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까 고민했는데, ‘석수장이 마음’이란 말이 있듯이 석불은 만드는 사람 마음이 투사된 것이고, 또 서민적이라는 면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20여 년 동안 석불 600 곳은 찾아다닌 것 같습니다.”

오늘 승가사에서 답사할 석불은 고려 불상으로 추측되는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제215호). 대웅전까지 오르는 계단길도 만만찮지만, 대웅전에서 마애불로 이어지는 108계단은 급경사에 계단이 밑으로 쏠리고 간간이 얼음이 붙어 있어 위험했다. 그렇지만, 이 박사는 그 옛날 팔공산 바위를 오를 때의 자신감으로 뚜벅뚜벅 올랐다. 마애불 아래에 서자 뒤로 보현봉쪽이 바라보였다. 새파란 하늘에 흰 눈 인 바위들은 더욱 힘차게 빛났다. 그러자 이 박사는 넌지시 산 얘기를 꺼냈다.

“산에서 겸허함을 배우는 이도 있지만, 오만해지는 이들도 있답니다.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랍니다.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어머니의 품에 잠시 안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산이 품어줘야 등정 또한 가능한 거죠. 산은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랍니다. 산에 와서 건강을 얻는 것은 부차적인 겁니다. 그 이전에 정신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게 더 큰 겁니다.”

이어 이 박사는 히말라야는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면 꼭 가봐야할 대상지라 강조했다.

“히말라야는 알프스와 무엇보다 무게에서 다릅니다. 알프스는 작은 감동을 주지만, 히말라야는 나를 전체적으로 누르는 거인입니다. 그와 함께 맑은 영혼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영적인 교감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래서 제가 네팔만 다녀오면 병원 직원들이 눈이 맑아지고 생기가 돈다고 말하는 것일 겁니다. 히말라야는 생각하게 해주고, 결심하게 해줍니다. 때문에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꼭 히말라야를 가봐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네팔을 후진국이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분명 선진국입니다.”

네팔 시를 번역해 시집 <새들의 노래>를 내기고 하고, 재작년 구기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자신의 집이었던 삼청동 가족아카데미의 한쪽 공간에 네팔문화를 소개하는 예티의 집을 마련하기도 했던 이근후 박사는 지난해 가을부터 한국-네팔 교류전을 열고 있다. 지난해 10월 네팔의 조주씨를 초청하여 첫번째 교류전을 연 바 있는 이근후 박사는 오는 2월 네팔 문화탐방 때 장무식 교수 도자기전을 열었고, 올 10월에는 네팔 화가를 초청해 두번째 교류전을 가질 계획이다.

그에 앞서 네팔 화가들과의 오랜 교류를 통해 선물 받거나 구입한 작품들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가족아카데미 가까이 삼청동의 ‘서울서 두번째 잘하는 집’에서 매월 작가를 바꾸어가면서 15점씩 전시하고 있다(문의 아카데미아 네팔캠프팀 전화 02-732-8144).

“폐쇄적인 사람에게도 등산은 도움됩니다”

이근후 박사는 승가사 법당 아래 계단을 내려서려 하자 맏딸 영주씨가 팔짱을 낀다. 아버지가 미끄러질세라 염려스러워서다. 조심스럽게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서면서 이 박사는 사람과 산이 어떻게 밀접한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옛날 수도자들이 산으로 들어간 것은 마음을 담담하게 가라앉히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등산인 가운데는 호연지기 기질인 사람도 있고, 폐쇄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자연을 즐기기 위해 산을 오르기도 하지만, 남들과 교류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산을 찾는 이들도 있는 거죠. 사람이 성숙하다는 것은 남과 더불어 생각하고 살아갈 줄 안다는 거겠죠. 나와 자연, 나와 우주 등 주체성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거죠. 물론 자아가 약해 폐쇄적이고, 남에게 상처받기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산에 다니는 게 좋습니다.”

이 박사는 “그것조차 안 된다면 저와 같은 사람을 찾아와야 합니다“며 보현봉 능선을 바라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글 한필석 기자
사진 정정현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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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인님의 댓글

산정인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한국의 지성 신경정신과 부분의, 이시영 박사 와  이근후 박사,많은분들에게 감명을 주셨고...오래전 두분의 강연과 글로, 개인적 으로 존경 하는 분이되....두분의 공통점은 산메니아 입니다,장문입니다만, 산정인 여러분 정독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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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인님의 댓글

산정인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위 글은 05.2월호 산지에 게제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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