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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m 14거봉 완등자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세 산악인을 비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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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m 14거봉 완등자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세 산악인을 비교한다

완등기간, 원정스타일, 장비, 식량, 마트코트 등의 공통점과 차이점

엄홍길(43), 박영석(40)에 이어 최근 한왕용(37)이 히말라야 8,000m급 14개 거봉 완등을 이루어냈다. 이로써 한국은 14좌 완등자를 3명이나 배출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됐다.

한국 산악계는 대원과 셰르파까지 15명이 한꺼번에 눈사태로 죽음을 맞는 등 히말라야 원정 초창기인 60년대 초부터 10여 년간은 불운과 불명예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77년 고상돈이 한국 최초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오른 후 양과 질에서 일취월장했다.

78년 1회, 80년과 81년 각각 2회, 82년과 83년에 각각 6회, 84년 13회 등 말 그대로 기하급수적으로 해외 고산원정 횟수가 늘어났다. 근본적으로는 오름짓 그 자체의 긴장과 고독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지속할 수 없는 것이 등반이지만, 고상돈에 이어 허영호 등 선배 산악인들에게서 등반으로 영예도 거머쥘 수 있음을 확인한 산꾼들이 너도나도 하얀 산의 꿈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고봉 등정이라는 꿈의 실현에는 필연적으로 돈이 드는데, 마침 한국 사회는 70년대에 이어 80년대에도 고도 성장을 지속, 여윳돈이 많아졌다. 여기에 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이루어지며 한국 산악인들은 그야말로 봇물 터진 듯 해외 고산을 향했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한국 산악계의 역량이 절정기에 이르러 거둔 결실이 곧 세 산악인의 14좌 완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물론 세 산악인 나름대로의 특별한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을 성과다. 세 사람은 다른 산악인들과 무엇이 어떤 점에서 어떻게 달랐던 것일까. 이들이 14좌 완등이란 위업을 이루기까지 선택했던 등반방식, 장비, 식량, 등반 스타일 등의 공통점과 차이점 등을 알아본다.

■ 완등 기간

완등을 이루기까지 걸린 기간은 엄홍길이 12년, 박영석은 8년, 한왕용은 10년이 걸렸다. 세 사람 모두 거의 매년 한 개 이상의 8,000m급 거봉을 오른 것이다.

엄홍길은 88년 첫 8,000m급 거봉으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이후 5년여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 벽등반에 몰두하다가 93년부터 본격적으로 거봉 등정 레이스에 나섰으므로 그도 실제로는 8년여가 걸린 셈이다. 그는 95년 한 해에 마칼루, 브로드피크, 로체 3개 거봉을 오르기도 했다.

박영석은 93년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거봉 등정 레이스를 시작했다. 97년 봄 다울라기리 등정 후에 그는 1년내 5개 거봉을 올랐고, 이듬해는 4개 거봉을 오르는 괴력을 보였다.
한왕용은 94년 초오유로 시작, 올해 브로드피크로 끝맺었다. 그 역시 한해에 2,3개 오르는 강한 체력을 보였다.

■ 특히 어려웠던 봉

등반은 역시 세계 제2위봉인 K2와 캉첸중가가 어려운 모양이다. 세 사람 모두 이 두 봉우리는 충분히 경험을 쌓은 뒤 후반기에 등정을 이루었다.

엄홍길은 안나푸르나에서 중상을 한 번 입었고 5회 도전 끝에야 등정, 이 봉을 가장 어려웠던 것으로 꼽는다. 그러나 이 봉 외에 어려운 봉으로는 역시 K2, 캉첸중가, 마칼루이며 이는 박영석, 한왕용도 같다.

■ 원정 스타일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세 산악인은 상호 경쟁적, 혹은 보완적 관계를 맺으며 거봉 완등을 이루어갔다. 각각 다른 원정대의 대장, 혹은 대원으로 나갔다가 현지에서 힘을 합해 등정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엄홍길과 박영석은 사뭇 치열한 경쟁 관계였다. 나중엔 누가 먼저 완등을 이루게 될까 궁금해질 정도로 등정 봉우리 숫자도 비슷해졌다. 2000년 봄 엄홍길이 13개봉을 올랐을 때 박영석은 11개봉을 올랐다. 엄홍길이 마지막 남긴 봉은 어렵기로 악명 높은 K2였다. 그러나 엄홍길은 2000년 7월31일 무난히 K2를 등정하며 거봉 레이스에 종지부를 찍었고, 박영석은 이 해 브로드피크와 시샤팡마를 오른 데 이어 이듬해 K2를 오르며 딱 1년 늦게 완등을 이루었다.

엄홍길, 박영석 두 산악인은 같은 원정대에 속했던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한왕용은 엄홍길, 박영석 두 선배 산악인과 여러 번 같이 등반했다. 특히 박영석과 한왕용의 동행이 잦았다.

박영석이 주도해 꾸린 원정대에 한왕용이 대원으로 참가해 오른 봉우리가 여러 개이며 이로써 한왕용이 등반가로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왕용은 박영석의 덕을 적잖이 입었다고 할 수 있다. 한왕용을 키우기 위해 한왕용 소속의 전주 개척산악회가 꾸린 원정대에 등반대장으로서 박영석이 참가, 성취한 등정도 몇 된다는 점에서는 박영석과 한왕용은 상부상조한 관계라고도 할 것이다.

엄홍길은 스페인 산악인들과 함께 오른 봉우리가 5개나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는 거봉 완등 레이스의 중반기인 95년부터 마나슬루, 브로드피크, 로체, 가셔브룸1봉, 안나푸르나를 스페인 바스크팀 대원들과 합동으로 올랐다. 성품이 호방한 그는 스페인의 정열적 산꾼들과 호흡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그가 거봉 완등 행보에서 가장 자주 함께 했던 이는 바로 스페인의 거봉 완등자인 후아니토 오이아르자발로, 5개봉 등정을 그와 함께 이루었다.

한국 산악인 중 엄홍길이 가장 자주 동행했던 사람은 박무택, 나관주 두 후배로 각각 4회, 3회 함께 등정을 이루었다. 그외 그는 민경태, 이인, 모상현, 구은수, 박주훈 등과 한두 번씩 함께 등반했다. 이렇듯 엄홍길은 특정 산악단체나 그룹에 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이런 저런 산악인과 뜻만 맞으면 동행하는 스타일이다. 그는 총 34회 거봉 원정을 나갔고 그중 18회 성공했다.

박영석은 늘 동행하는 후배 그룹이 있다. 한왕용도 그 중 한 사람이었으며, 오희준, 강성규, 이현조, 김형우, 나관주, 홍성택, 유철목 등 여러 사람이 그와 더불어 원정, 덩달아 8,000m 고봉 3~6개씩을 오른 실력자가 됐다.

박영석은 대학산악부(동국대) 출신답게 팀웍과 인화를 중요시하며 이렇듯 후배 산악인 키우기에도 많은 신경을 쏟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대원 1명을 추가하는 데 수백만 원씩 경비가 더 든다. 또한 초보자들은 데려가 보았자 짐만 될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능력이 닿는 한 대학산악연맹 후배들을 동행했다.

그의 이러한 배려로 고산 경험을 쌓은 산악인들이 크게 늘어난 점만으로도 그는 한국 산악계에 큰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원정대 대원으로서 8,000m 거봉 등정자가 된 사람은 모두 20여 명이나 된다.
그의 해외원정 횟수 50회 중 8,000m급 거봉 원정은 31회로, 그중 18회 등정했고 13회 실패했다.

한왕용은 우석대산악부 부원으로 등반을 시작했고 나중에 전주 개척산악회에 가입했다. 초반기에는 박영석과 함께 줄곧 등반하며 경력을 쌓다가 98년 엄홍길과 더불어 안나푸르나를 올랐다. 또한 엄홍길의 거봉 완등 마무리 등반인 2000년 K2 원정에 동행, 등정을 이루었다. 이렇듯 그는 두 선배들과 동행하며 캐리어를 쌓았지만, 한편 두 선배는 그의 남다른 능력이 자신들의 등반에 도움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한왕용은 7번째 봉인 낭가파르밧부터 박영석 선배와 다른 독자적 행보를 시작했다. 그러나 두 선배의 그늘에 가린 그는 별도로 저만의 원정대를 꾸리기가 매우 어려웠다. 대개 거봉 원정은 기본이 몇 천만 원인데, 98년 낭가파르밧은 그와 나관주 대원 단 두 명이 700만 원만으로 등정했다. 고소포터도, 쿡도 없었고, 워낙 짐이 없어 포터도 고작 20명뿐이었다. 그의 어느 후배는 한왕용의 내핍 등반에 대해 이렇게 비교해 말한다.

“왕용이 형이 등반하려고 올라갈 때의 장비·식량 보따리와 홍길이 형 등반 끝나고 하행 카라반할 때의 장비·식량 보따리 양이 똑같답니다.”

한왕용의 거봉 완등 행보는 두 선배 덕에 쉽기도 했고, 한편 두 선배의 명성에 가려 어려웠다고도 할 수 있다. 한왕용은 거봉 원정을 총 20회 나갔고 그중 14회 성공했으니 성공률로는 두 선배보다 단연 앞선다.

■ 셰르파 고용

셰르파는 고소등반시 매우 중요한 존재다. 세 사람은 각자의 스타일에 따라 선호하는 셰르파도 달랐다. 엄홍길은 나티와 다와 두 셰르파와 자주 동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등반 도중 사망하고 말았다.

박영석은 첫 8,000m급 등정시 동행했던 가지 셰르파와 모두 8개봉을 함께 올랐다. 그리고 세라부 장부와는 4개봉을 함께 하는 등 “이 친구들은 셰르파가 아니라 파트너”라고 얘기한다.

한왕용은 밍마와 왕추 셰르파를 좋아해, 각각 2~3번씩 동행케 했다. 이렇듯 세 사람 모두 대원이든 셰르파든 과거 손발이 한 번 맞았던 사람을 계속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사실 모든 산악인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 등반 스타일과 등반 식량

엄홍길은 여러 차례 동행했던 스페인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준비성이 우선 철저하고, 개인주의적이면서도 팀웍이 아주 좋습니다. 그러니까 경량 등반이 되죠. 그러면 전 대원 등정도 가능해지고 말이죠. 될 수 있으면 1차 시도에 등정을 노리는 스타일입니다. 그리고 즐기는 스타일이구요.”

이는 그대로 엄홍길 자신이 좋아하는 등반 스타일이기도 하다. 그는 베이스캠프에서도 대원들의 술 담배를 통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사 지지부진하면 혹독하게 몰아친다고 밝힌다.

등반 중에는 대개 대원이나 셰르파들이 지는 만큼 자신도 짐을 지고 움직였고, 길이 막히면 직접 나서서 루트개척을 해야 직성이 풀렸다고 한다. 그는 별명이 ‘탱크’다. 이 별명은 그의 강한 힘과 더불어 강한 추진력도 상징한다. 그의 이러한 탱크 같은 괴력을 타 대원들이 좇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탱크처럼 자못 저돌적으로 등정을 추구하는 스타일이 된 연유를 90년대의 어느 쓰라린 추억에서 찾는다. “내 자신이 루트 대부분을 뚫었으나 정작 등정조에서는 제외됐던 아픈 과거가 있다”고 그는 돌이킨다.

아무튼 남다른 괴력을 가진 그가 이렇듯 강하게 밀어부치는 방식의 등반을 추구하며 당연히 크고 작은 사고가 여러 번 생겼다. 동료 대원이 하산 도중 실종, 혹은 추락사한 사고가 여러 건 있었고, 그 자신 또한 100여m를 추락, 발목이 뒤틀리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이 때 그는 3일간에 걸쳐 이를 악물고 기다시피 하며 베이스캠프로 살아내려오는 강한 투지를 보였다.

그는 베이스캠프에서나 고소캠프에서나 식사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먹는 것에는 돈 안 아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야채와 육류만 현지에서 구입하고 그외 거의 모든 것을 국내에서 준비해갔다. 이미 89년부터 네팔인 요리사 덴지를 원정 때마다 동행, 조리를 맡게 했다. 때문에 덴지는 엄홍길의 취향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아 아예 식단을 알아서 조절할 정도가 됐다고 한다. “웬만한 한국식당 주방장보다 낫다”고 엄홍길은 그를 칭찬한다.

베이스캠프에서 엄홍길은 주로 된장찌개, 김치찌개 등 찌개류를 즐겨 먹는다. 그리고 “가능하면 베이스 식단을 최대한 위로 올린다”는 주의다. C1, C2까지도 가능하면 덴지가 조리한 음식을 지퍼백이나 날진 통에 담아서 올려 보내게 하여 누룽지 끓인 것, 아니면 알파미를 먹는 스타일이다.

운행 때도 그는 가능하면 김밥을 챙겨간다. 등정을 앞둔 최종캠프에서는 꼬리곰탕캔에 밥을 말아 먹기를 즐긴다. 때문에 등정 전 8,000m 고소에서도 반드시 대변을 보아야 한다. 이렇게 철저히 밥을 챙기는 대신 운행 중 주전부리는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박영석도 대원들 술 담배는 모자랄까봐 통제는 할 망정 자유롭게 놓아두는 편이다. 그러나 그 역시 후배들이 반드시 명에 따르게 한다. “고산에서는 경험자의 판단이 곧 최선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K2 고소캠프에서 내려가라는 말 듣지 않고 버티다가 하반신이 마비되는 바람에 아래 캠프로 후송하느라 다른 대원 여러 명이 죽음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면서 그는 “대원 통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한다.

먹는 스타일은 엄홍길과 판이하다. “베이스캠프에서 무지하게 먹고, 등반 중에는 일주일까지도 굶는다”고 그는 밝힌다. 그는 어릴 때 꿈이 주방장이었을 만큼 요리를 좋아한다. 공군 복무시 말년에 일부러 장교식당 관리병으로 자원해 가서 요리자격증을 가진 군무원과 방위근무자에게 요리를 배웠을 만큼. 그런 그는 베이스캠프에서도 각종 음식을 직접 조리한다. 육류를 주로 섭취하고 김치말이냉면 등도 즐긴다.

대장이 좋지 않아 툭하면 설사를 하기에 일단 베이스캠프를 떠나면 물, 비타민, 그리고 미숫가루나 좀 타서 마시는 것으로 끝낸다. 특이한 점은 박영석은 C2에 스프라이트, 혹은 콜라나 사이다를 20~30개나 올려두고 속이 더부룩할 때마다 마신다. 그러고 나서 트림을 한 번 하면 속이 편해진다고 한다.

설사를 미리 막기 위해 C2쯤에서 그는 정로환 4알과 로페린 2알을 복용한다. 그 후 며칠이고 먹지도 않고 대변도 보지 않고 버티다가 등정 후 베이스캠프로 내려와서야 비로소 배변을 하는데, 물론 변이 돌덩어리처럼 굳어 엄청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엄홍길도 여러 번 그런 등반을 했지만, 박영석은 이런 체질 때문에라도 세미 알파인스타일로 최대한 등반을 빨리 끝내는 스타일을 선호했다고 한다. 고전적인 고봉 등반방식은 캠프를 하나 설치해두고 내려와서 쉬다가 그 다음 제2캠프를 설치, 거기서 고소순응을 한 뒤 베이스캠프나 제1캠프까지 내려왔다가 제3캠프로 전진하는 이른바 극지법이다. 이렇게 내려오지 않고 계속 캠프를 위쪽으로 옮겨 설치하며 오르는 방식을 알파인 스타일이라 하는데, 이 두 가지 방식을 혼합해 쓰면 세미 알파인 스타일이다.

“8,000m급 고봉 등반서는 캠프를 3~4개 설치하는데, 저는 캠프를 반쯤 생략하거나, 아니면 C1 설치하고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가 그 다음 곧바로 C2, C3로 올라가 자고는 등정하고 곧바로 베이스캠프로 내려가는 식으로 했죠. 2001년 K2 때도 C2까지 설치하고 C3, C4는 올라가면서 설치, 곧바로 등정했습니다. 로체 때는 C1만 세우고 그 다음 C2, C3 치고 정상 갔고, 시샤팡마 남벽 때는 C1을 치고 C2, C3는 설동 파고 자고 곧바로 등정했고, 뭐 거의다 그런 식이었어요.”

그런 식으로 그는 초오유를 1박2일만에 등반을 마쳤다. 중간에 C2만 설치하고 잔 뒤 다음날 곧장 등정 후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왔던 것이다. 등반은 셰르파를 앞세우고 가다가 기술적으로 어려우면 자신이 나서서 뚫었다. 눈이 허벅지까지 빠지는 초오유 정상 설원을 돌파할 때도 셰르파와 교대로 러셀을 했다. 그와 늘 동행해온 후배들 또한 힘 좋기로 정평이 나 있지만 박영석을 앞서지는 못한다고 한다. “단 1%라도 가능성이 남아 있으면 포기하지 않았다”고 그는 밝힌다.

이러한 등반 스타일은 당연히 여러 번 극한상황을 가져왔다. 안나푸르나에서 하산 중 크레바스에 빠졌으나 배낭이 걸리며 천운으로 살아났다. 초오유에서는 한왕용과 텐트 안에 있다가 눈사태에 휩쓸리면서 갈비뼈가 부러진 적이 있고, 에베레스트 북동릉에서도 눈사태로 700m나 쓸려내려가기도 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는 150m나 추락, 안면이 뭉개지는 중상을 입고 외국인 의사에게 마취 없이 고소캠프에서 수술을 받는 고통을 견디어야 했다.

역시 같은 에베레스트 남서벽 하산 도중 디피컬티 크랙 위 15m 직벽에서 고정로프 두 가닥 중 한 가닥에(50%의 확률에) 목숨을 걸었다가 결국 살아났을 때는 ‘너무 무서워서’ 통곡했다. 그는 늘 많은 대원들을 동행한 만큼 사망사고도 여러 건 발생했다. 그는 “그 때마다 또 너무 슬퍼서 엉엉 한참 울었다”고 그는 돌이킨다. 세 사람 중 그의 거봉 완등 여정이 특히나 드라마틱하다.

한왕용은 전형적인 극지법 등반을 선호했다. C1 설치 후 바로 베이스캠프로 하산해 머물다가 C1 올라가서 자고, C2 설치 후 다시 곧바로 베이스캠프로 하산, 날씨가 좋아지면 C3까지 전진, 그대로 잔 다음날 등정하곤 했다. 또한 그는 조금이라도 위험이 커진다 싶으면 정상을 바로 앞에 두고라도 되돌아섰다.

한왕용이 두 선배와 달리 등반 도중 큰 부상을 한 번도 입지 않았고 또 동행자 중 사고로 사망한 이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이런 안정적 방식을 주로 택한 덕이 클 것이다. 그는 의식할 경쟁상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한결 편한 마음으로 거봉 완등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거봉 완등이란 험로를 완벽하게 무사한 상태로 지나지는 못했다. K2에서 산소마스크를 유한규 선배의 등정을 위해 넘겨주고 그는 무산소로 등정했으나 그 때문에 귀국 후 네 차례 뇌혈관수술을 받아야 했다.

한왕용도 또한 크레바스에 여섯 번 빠졌고, 눈사태를 두 번 맞았다. 마지막 봉인 올 여름의 브로드피크 등반 중에도 크레바스에 빠졌으나 마침 자일로 다른 대원과 연결돼 있었던 덕분에 살아났다. 그외, 그는 추락이나 실족도 여러 번 겪었지만 부러지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세 사람 중 특히나 운 좋은 사나이다.

한왕용은 짐을 셰르파들이나 거의 마찬가지로 많이 지고 움직이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10회에 6~7회는 앞장서서 루트개척을 하는 스타일이다. 등반 방식은 사뭇 다르지만 앞장서서 루트를 여는 스타일이란 점은 세 사람이 공통된다.

한왕용은 베이스캠프에서는 거의 육류 식단으로 일관한다. 불고기나 염소고기 요리, 혹은 닭백숙 등을 즐긴다. 또한 어떻게든 밥을 해먹는 편이다. 때문에 그는 C1까지도 압력밥솥을 가져간다. C2부터는 알파미 밥에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먹기를 좋아한다. 때문에 그는 늘 원정 때면 멸치를 10kg이나 가져간다. 간식거리로도 멸치가 최고라는 그다. 고소캠프에서는 쇠고기죽, 옥수수죽 아니면 가루우유에 비스킷을 즐긴다. 그러다 등정시는 물 한 통과 사탕만 몇 알 가져간다.

엄홍길, 박영석 두 사람은 베이스캠프에서도 술을 즐기지만 한왕용은 일체 입에 대지 않는 스타일이다. 평소에도 술을 크게 즐기는 편은 아니다.
등정일은 언제 어떻게 결정하는가. 세 사람 모두 일기 정보보다는 직감에 크게 의존했다. 날씨가 아무리 좋아도 직감이 좋지 않으면 결코 움직이지 않았고, 그러다 느낌이 좋아지면 등정길에 나섰다.

■ 등반 장비

세 사람 모두 고소에서 모자는 철저히 챙겨 썼다.
엄홍길은 눈만 나오게도 쓸 수 있는 복면 같은 발라클라바는 주위의 고무줄이 답답해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주로 차양 달리고 볼을 감쌀 수 있는 구조인 고소모를 애용했다. 그는 그외 모든 등반용 의류는 평소 입는 것보다 한 사이즈 큰 것을 고른다. “숨 쉬는 것도 어려운데 옷마저 답답하게 조여서야 쓰겠습니까?”하고 그는 반문한다.

그는 목에는 반드시 실크스카프를 둘러 보온을 했다. 상의는 안에 라이크라 같은 신소재 반팔티, 그 위에 서브제로 내의, 그리고 얇은 파일로 만든 티셔츠를 겹쳐 입었다. 그렇게 움직이다가 추우면 다운 조끼, 아니면 고어텍스 재킷을 걸쳤다.

하의는 헐렁한 트렁크 스타일의 팬티에 서브제로 내의, 그 위에 역시 얇은 파일을 입었다. 최종캠프에서 자고 등정할 때는 발란드레 우모복을 애용했다. 원피스는 대소변 때 불편해 반드시 투피스를 입었다.

장갑은 얇은 윈드스토퍼 5지 장갑을 끼고 다니다가 추우면 신슐레이트를 보온재에 안에 파일을 대고 겉에 고어텍스로 처리한 5지 장갑으로 바꾸어 끼었고, 더 추우면 벙어리 우모 장갑을 더 끼었다.

고글은 일반형과 방풍이 완전히 되는 스키慈 하나씩 챙겼다. 눈보라 칠 때 스키고글은 코도 따듯하게 해주는 등 보온상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한다. 등산화는 스패츠 일체형인 원스포츠 것을 쓰며, 벽이라고 해도 플라스틱 이중화는 발이 시려서 거의 신지 않는다고 한다.

피켈은 그리벨 70~80cm 짜리를 주로 썼고, 스키폴도 늘 휴대, 상황에 따라 번갈아 썼다. 아이젠은 실수로 벗겨지는 일이 없는 구조인 샤를레모제 원터치식을, 벨트는 넓적다리 부분이 분리되는 티롤형 하단만 사용했다. 8자 하강기는 장갑 낀 상태로 쓰기에 불편하고 자칫 잃어버릴 수도 있어 안전벨트에 연결한 채로 자일을 걸고 뺄 수 있는 로보트 형을 쓴다.

랜턴은 배터리 팩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구조의 페츨 랜턴을 90년 들어서부터 써왔다. 최근 유행하는 LED랜턴은 장시간 쓸 수 있지만, 눈밭에서는 눈이 부시고 빛줄기가 멀리 가지 않아 루트파인딩하는 데 불편해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배낭은 국산 써미트 65리터짜리만 거의 사용해왔다. 자신의 체형에 가장 잘 맞고 또 편하다는 것의 그의 평이다. 버너도 국산 코베아가 고소에서도 쓸 만했다고 한다.

수통은 날진통에 커버를 씌워 사용했다. 주둥이가 넓어서 물을 담거나 마시기에 좋으며, 반드시 2개를 챙겼다가 잘 때 물을 덥혀 담은 뒤 침낭 발치에 하나 넣고 가슴에 하나 안고 자면 최고라고 한다.

박영석은 C2 이상에서는 늘 발라클라바 얇은 것을 쓰고 지냈다. 그러다 더 추우면 그 위에 고소모를 덧썼다. 고글은 일반형에 옆은 빛가리개가 달린 것을 애용한다. 둥글게 휘어 얼굴에 딱 맞게 된 신형 고글은 땀이 차서 별로라고 한다. 목은 실크스카프 얇은 것을 두 번 감아주면 보온도 되고 햇볕도 차단해주어 최고라고 한다. 팬티는 땀이 차는 등 불편하여 거의 입지 않는다.

옷은 고소내의를 입은 다음 그 위에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었다. C2까지도 대개 그 복장으로 오르내리다가 추우면 윈드스토퍼 의류를 겹쳐 입는 것으로 끝냈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늘 충분했다고 한다. 우모복은 등정 때나 입었다.

장갑은 바닥에 가죽을 댄 5지 장갑을 애용했다. 그는 “하강기 하나라도 무게를 줄이기 위해” 하강 때도 하강기를 쓰지 않고 로프를 등으로 돌린 상태로 이 장갑으로 잡고 쏜살같이 내려가는 방식을 즐긴다. 등정 때는 물론 우모 벙어리장갑을 쓴다.

안전벨트는 블랙다이아먼드의 허리벨트만 썼다. 등산화는 엄홍길과 마찬가지로 거의 원스포츠만 쓰지만 낭가파르팟 같은 벽을 오를 때는 플라스틱 이중화로 갈아 신기도 했다. 피켈은 그 역시 그리벨 70~80cm짜리를, 아이젠도 그리벨 제품을 썼다. 수통은 그도 역시 날진통을 썼다.

랜턴은 리튬 전지를 쓸 수도 있고 좌우로 크기와 밝기가 다른 조명구가 붙어 있는 일제 내셔널랜턴을 오랫동안 써왔다. “아마 더 좋은 것이 있겠지만 고산에서 특히 랜턴 같은 장비를 성능을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으로 써본다는 것은 곧 목숨을 건다는 뜻이므로 장비를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배낭은 노스페이스 제품 중 최경량인 것을 골라, 거기서 프레임을 빼내고 장식 슬링도 잘라내버렸다.

이렇듯 무게에 신경 쓰이는 것이 고산등반인데, 세 사람은 등정 때는 모교, 지원단체, 후원사 등의 깃발들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 대개 작게 규격을 정해 만들어오게 하지만, 그래도 적잖이 무게 부담이 된다고 한다.

한왕용 역시 해발 3,000m를 넘으면서는 잘 때도 고소모를 쓴다. 머리 보온에 세 사람 모두 이렇듯 철저하다. 한왕용은 습기로 뿌옇게 가리는 것이 싫어, 통기가 잘 되게끔 고글의 옆 가리개까지 떼어내고 쓴다. 두 선배와 달리 목도리는 하지 않는 대신 목이 긴 폴라티셔츠를 입는다.

상의는 고소내의 얇은 것과 두꺼운 것을 겹쳐 입고, 등정 때는 그 위에 우모복을 겹쳐 입는다. 하의는 그 위에 신축성이 좋은 파일로 만든 한편 방풍도 어느 정도 되는 파워스트레치를 입는다.

장갑은 얇은 장갑 위에 윈드스토퍼 5지 장갑을 끼고 등정까지 대개 한다. 손이 따듯한 편이어서 우모 장갑은 거의 쓴 적이 없다. 신발은 아솔로 검은색 이중화를 신고 8개봉을 올랐으며, 2000년부터 원스포츠 제품을 썼다. 그외 수통 사용법까지도 그는 두 선배와 비슷하다. 다만 하강기는 8자 하강기를 고수하며 스키스톡은 크레바스 확인이 필요할 때나 쓰고 주로 피켈에 의존한다. 랜턴은 선배 박영석처럼 일제 내셔널 제품을 쓰다가 LED랜턴으로 바꾸었는데 오래 가고 가벼워 아주 마음에 든다는 그다.

■ 마스코트 & 트레이드마크

엄홍길은 96년부터 ‘지’라고 부르는 네팔 문양석 목걸이를 지니고 등반해왔다. 눈(眼)의 모양이 드러나는 몽당 연필만한 크기의 이것은 에너지가 생긴다는 의미를 가진 일종의 네팔 부적으로서 값이 매우 비싸다. 그는 목욕할 때도 이것을 걸고 있을 정도로 의미를 주고 있다.

엄홍길의 트레이드마크는 갈색 중절모. 93년 칸텡그리 포베다봉 등정 후 카자흐스탄 매니저로부터 선물받은 것이다. 2001년 그것을 잃어버린 후 비슷한 것을 구해 쓰고 다니고 있다.

박영석은 가느다란 끈으로 된 목걸이가 마스코트다. 이 목걸이를 차고 모두 13개 거봉을 올랐다. 이것이 없으면 뭔가 겁이 나서 산에 가지 못할 정도가 됐다고 한다. 그는 다소 휑한 머리를 가릴 겸 노스페이스 채양모자를 트레이드마크 삼아 늘 쓰고 다닌다.
한왕용은 주술(?)을 걸어둔 마스코트는 없지만, 밀레 마크를 새긴 벙거지가 어느새 그의 상징처럼 됐다.

■ 모산(母山)

한 해에 8,000m급 거봉을 몇 개씩 오르는 등, 힘으로 말하면 세 사람 모두 일반인들로선 족탈불급인 수준이다. 이들은 어떻게 그런 힘을 키운 것일까.

엄홍길은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어릴 때 도봉산 기슭으로 이사, 유년을 보내며 산과 친해졌다. 79년 양주고교를 졸업한 후엔 설악산 희운각대피소에서 매주 서너 번 20~30kg의 물품을 지어다주며 2년여 산중 생활을 했다. 그 후 그는 해군 수중폭파대에 입대, 3년을 지나며 강철 같은 몸을 키워냈다.


박영석은 서울 남산 기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동국대산악부 시절 매일 남산 약수터까지 10km 뜀박질을 하며 체력을 다졌다.


한왕용은 91년부터 2년간 지리산 뱀사골산장에서 지내며 매주 서너 차례 반선에서 뱀사골산장까지 긴 산길을 50kg의 짐을 지고 오르내리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어 1년간은 전북학생산악연맹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에 선발돼 주중 닷새간은 하루 4~5시간씩 체력단련을 하고 주말은 산행하는 생활을 했다.


이렇듯 세 사람은 청년 시절 몇 년간 강도 높게 산을 통해 체력을 다지는 시기를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엄홍길을 도봉산과 북한산이 키워냈다면, 박영석은 남산이, 한왕용은 지리산이 키워냈다고 할 것이다.


■ 후원자들

세 산악인이 어렵고도 긴 거봉 완등 행보를 이어갈 수 있었던 데는 주위 선후배들의 도움이 없고서는 거의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엄홍길은 자신을 홍보이사로 영입, 안정적으로 가정을 유지하며 원정등반에 몰입할 수 있게 해준 파고다아카데미 고인경 회장, 그가 속한 거봉산악회 회장으로서 몇 차례 원정대를 꾸리는 데 앞장서준 동진의 강태선 사장, KBS 이거종 부국장, 코오롱정보센터 책임자였던 유한규씨, 트렉스타 이상도 사장 등의 덕을 크게 입었다.


박영석은 동국대산악부 선배인 이인정 한국등산학교 교장, 대학산악연맹 선배 정상욱씨, 자신을 이사로 영입해 연봉을 주어온 노스페이스 상표의 영원무역 성기학 사장, 홍보효과보다는 인간적인 매력을 느껴 적극 후원해준 엘지화재 구자준 사장, 거의 아무런 반대급부도 요구하지 않고 거액을 원정자금으로 쾌척한 인터넷게임회사 NC소프트 김택진 사장 등을 그는 특히 고마운 분으로 꼽는다.


한왕용은 개척산악회 선배 이동호씨가 동분서주하며 원정비를 마련해주는 등 그의 후원이 없었다면 거봉 완등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전주 소정형외과 소병겸 원장, 강익수 단장 등도 잊어서는 안될 고마운 후원자이며 특히 마지막 2개봉을 남겨둔 상황에서 부장으로 특채, 안정적 사회생활이 가능케 해준 한고상사 한철호 사장을 그는 거명한다.

■ 세 산악인의 등정 기록

△ 엄 홍 길

1988 가을 에베레스트
1993 가을 초오유
1993 가을 시샤팡마
1995 봄 마칼루
1995 여름 브로드피크
1995 가을 로체
1996 봄 다울라기리
1996 가을 마나슬루
1997 여름 가셔브룸 1봉
1997 여름 가셔브룸 2봉
1999 봄 안나푸르나
1999 여름 낭가파르밧
2000 봄 캉첸중가
2000 여름 K2

△ 박 영 석

1993 봄 에베레스트
1994 가을 초오유
1996 봄 안나푸르나
1997 봄 다울라기리
1997 여름 가셔브룸1봉
1997 여름 가셔브룸 2봉
1997 가을 로체(2001년 봄 재등정)
1998 여름 낭가파르밧
1998 가을 마나슬루
1999 봄 캉첸중가
2000 봄 마칼루
2000 여름 브로드피크
2000 가을 시샤팡마
2001 여름 K2

△ 한 왕 용

1994 가을 초오유
1995 가을 에베레스트
1997 봄 다울라기리
1997 여름 가셔브룸1봉
1997 가을 로체
1998 봄 안나푸르나
1998 여름 낭가파르밧
2000 봄 마나슬루
2000 여름 K2
2001 봄 마칼루
2001 가을 시샤팡마
2002 봄 캉첸중가
2003 여름 가셔브룸2봉
2003 브로드피크

<안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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