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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석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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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가지 꽃이 핀 듯 아름다운 암릉, 천화대(天花臺). 그곳에 솟아난 것은 금수강산에 버금가는 꽃처럼 활짝 핀 침봉들만이 아니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설로 남아있다. 바로 석주길에 얽힌 세 명의 자일 파트너들의 우정과 사랑이다. 그들의 전설은 공룡릉, 장군봉과 적벽, 울산바위, 화채봉, 염라길, 흑범길, 천화대가 한눈에 펼쳐지는 석주길을 따라 아로새겨져 있다. 이처럼 외설악을 아우르는 석주길의 조망은 뭇 등반가들의 가슴에 애틋한 환희를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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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말 요델산악회 송준호, 엄홍석, 신현주 세 사람은 서로 자일 파트너였고 친구이자 연인 사이였다. 어느 날 송준호는 세 사람의 소중한 관계를 지키기 위해 두 사람 곁을 홀연히 떠났다. 얼마 후 연인이 된 두 사람은 설악산 천당폭 빙벽을 오르던 중 신현주가 실족하자 확보를 보던 엄홍석이 그녀의 추락거리를 줄이기 위해서 빙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빙벽에 설치한 확보물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여 두 연인은 한 자일에 묶인 채 추락했다.

그 후 송준호는 69년 설악골에서 천화대로 이어지는 암릉을 처음 올랐고, 코스 이름을 ‘석주길’이라 붙였다. 의형제 엄홍석과 그의 여인 신현주의 이름 끝자인 ‘석’과 ‘주’를 따온 것이다. 그리고 ‘석주길’이라고 새긴 동판을 만들어 천화대와 만나는 바위봉우리의 이마 부분에 붙여 두 사람의 영전에 바쳤다.

하지만 송준호 역시 73년 초 토왕폭을 단독으로 오르다가 실족하여 먼저 간 두 친구의 영혼을 뒤따르게 된다. 그렇게 석주길의 신화가 설악산에 태어났다.



천화대의 전설이 된 ‘석’과 ‘주’의 애틋한 사랑

9월 11일 비선대 산장에 들어섰다. 월요일 저녁임에도 20여 명의 등반가들이 여전히 산장에 둥지를 틀고 있다. 주말에 이어 아침 일찌감치 등반에 나섰다가 돌아온 모양이다.

취재팀은 침상 끄트머리에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일행은 최미선, 채원아, 엄기준(38세·쇼핑몰 클리프행어 대표)씨다. 모두들 봔트클럽 회원들이다. 또한 동갑내기들이다. 여고시절부터 산악부원으로 활동했던 최미선씨는 10년만의 석주길 나들이라고 한다. 채원아씨 또한 10여 년 전 코오롱등산학교를 나온 후 좀체 활동이 뜸하다 모처럼 등반에 나섰다. 듬직한 두 여장부들과 선등을 도맡아 할 엄기준씨와 함께 산장 옥상에서 떨어지는 별을 바라보며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다.

해가 뜨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날 남긴 밥에 북어국을 끓여먹고, 점심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챙겼다. 아침 햇살이 산장에 드리웠다. 하얀 원뿔형 장군봉과 불그스름한 적벽이 압도하듯 눈앞에 버티고 서 있다. 등산인에게는 경이로움과 동경으로, 등반가에게는 짜릿한 설렘과 피를 끓게 하는 대상이 아닌가.

에메랄드 빛 계곡물이 내려다보이는 구름다리를 건너 천불동으로 들어선다. 등산로를 500여 미터 따르니 설악골 출입금지 표지판이 나온다.

“출입금지 구역으로 들어가네.”

“우리는 언제나….”

최미선씨와 엄기준씨가 장단을 맞춘다. 등반가는 위험을 동반한 행위를 즐기는 까닭에 일탈을 꿈꿀 수밖에 없다. 설악골이 고이접어 간직한 매끈한 담과 소를 취재팀 앞에 내보였다.

“오랜만에 설악을 보니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채원아씨가 미처 입을 다물지 못한다. 협곡의 둥그스름한 홈을 타고 내려오는 물살이 잠기는 커다란 담은 설악골의 백미다. 하얀 암반과 아기자기한 폭포들이 퍼포먼스를 펼치는 골을 1시간쯤 올라설 때 최미선씨가 계곡 좌측 숲에서 고함을 친다.

“여기가 곰의 모덤이에요.”

곰의 무덤은 밑에 어른 대여섯 명 누울 만한 공간이 있는 커다란 바위를 말한다. 바위에는 ‘석주<-’라고 글씨가 써 있다. 10년만의 석주길 나들이라는 최씨의 길눈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실상 설악골 뿐만 아니라 설악이 그녀의 청춘을 보낸 단골 놀이터였으니 당연지사다.

8시 20분 곰의 모덤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탄다. 코가 땅에 닿을 듯 경사가 심하다. 10분정도 올라서니 석주길 초입 암릉이 숲 사이에 나타난다. 장비를 착용하고 안자일렌으로 한 몸이 되어 오른다. 숲을 빠져나오자 뒤편으로 외설악 전경이 펼쳐진다. 우회길 좌측으로는 낙타등처럼 생긴 작은 침봉이 서 있다.

“제법 폼 좀 나요?”

엄기준씨가 낙타등 침봉에 올라타 뾰족한 원뿔에 슬링을 걸어 낙타를 모는 시늉을 해본다. 엄씨 뒤로 펼쳐지는 장군봉, 적벽 등의 기세에 힘입어 설악을 호령하는 듯하다.

장난삼아 타본 낙타등 침봉을 내려와 암릉 우측으로 우회해서 오른다. 홀드가 양호한 8미터쯤 되는 디에드르 벽을 올라서자 뒤쪽으로 배경이 시원스럽게 터진 암릉 위다. 곧게 자란 빼어난 소나무가 솔내음을 풍기고, 우측으로는 천년만년 묵었을 수려한 암릉이 절벽을 이루며 줄달음친다. 암릉을 넘어서자 거대한 말안장처럼 생긴 바위가 어서 올라타라고 자세를 낮춘다. 최미선씨와 채원아씨가 말을 타듯 올라타며 동심으로 질주한다.

암릉은 널찍한 평지로 연결되다 완만한 슬랩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를 넘어선다. 정면에 곰 발바닥처럼 생긴 붉은 바위가 버티고 있다. 길은 바위 우측의 너덜지대를 지나 정면의 바위에 올라타고 왼쪽으로 트래버스하여 정상에 올라선다.

“저기 정상 바위 양쪽이 다 곰의 얼굴 형상이네요.”

최미선씨 말을 듣고 보니 정상 바위봉우리는 영락없는 두 곰의 얼굴이 붙어 있는 형상이다.곰바위봉 우측으로는 촛대봉이 솟아있다. 곰바위에서 내리뻗은 암릉에 올라서는 채원아씨가 크랙에서 몸부림을 친다.

곰바위봉에 올라타자 조망이 시원스럽다. 특히 왼쪽으로 천화대를 향해 같이 뻗어가는 흑범길, 염라길 암릉은 햇빛에 물고기의 비늘처럼 은빛으로 번뜩여 눈이 부실정도다. 뒤편으로는 올망졸망한 바위들이 머리를 땋아 늘인 듯한 모양새로 설악골로 뻗어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하늘에 깔린 구름 탓에 설악산 7부 능선 위는 좀체 볼 수 없다. 더욱이 짙게 깔린 구름은 금세라도 소나기를 퍼부을 듯 하다.



외설악 비경 너머로 동해바다 넘실대고

암릉구간을 지나 곰바위봉 중단 우측의 크랙을 오른다. 이미 곰바위봉 맨 끝에 오른 엄기준씨는 곰과 엉켜 싸우듯 몇 번인가 오름짓을 시도하다 자포자기하고 우측으로 암릉을 우회한다.

바위 연결부분 뜀바위에서 최미선씨가 힘찬 도약을 하여 가뿐하게 착지한다. 역시 왕년의 베테랑다운 실력이다. 최씨는 정승권등산학교 1기 졸업생이기도 하다.

엄기준씨는 이미 채원아씨의 확보를 받고 운무에 휩싸인 암릉을 올라섰다. 5명이서 60미터 한 동으로 안자일렌하고 오르니 등반이 수월하게 이뤄졌다. 배낭 속에 든 한 동은 오히려 짐만 될 뿐이다.

침니를 오르는 최원아씨 뒤편으로 펼쳐진 공룡능선은 여전히 운무에 감싸여 있다. 바로 건너편에는 밤톨같은 바위 3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옆에 촛대바위가 불끈 솟아있다. 산 아래쪽에서 목탁소리가 은은하게 산곡에 울려퍼진다. 하지만 그 청정한 소리도 설악 한 가운데 선 취재팀에게는 소음일 따름이다.

“에구, 채원아 온몸으로 비비는 구나. 더군다나 바위가 살았어.”

레이백으로 벽을 뜯으면 될 것을 침니에서 채원아씨가 몸부림치고 있다. 하지만 거친 호흡을 쉴새없이 내뱉으면서도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힘들게 오른 만큼 널찍한 암반이 정상을 형상하고 있다. 모처럼 깊게 심호흡하고 여유를 찾는다.

바로 건너편에는 엄기준씨가 거미처럼 운무에 휩싸인 몽통하고 도드라지게 선 벽에 붙어있다. 확보 소리를 듣고 암각에 걸쳐놓은 슬링을 이용해 하강한 다음 자신만만하게 바위에 붙는다. 하지만 웬걸, 오버행을 이룬 벽의 홀드는 크지만 좀체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긴장감이 온 몸으로 퍼지기 시작하고 손가락 힘이 다 빠져나갈 즈음에서야 벽을 넘어선다.

바람이 제법 거세다. 주변은 천길 낭떠러지다. 웃옷을 꺼내 입는다. 갑자기 세상이 바뀌듯 운무가 거친다. 성곽을 이룬 칼날능선이 천화대 희야봉을 향해 하얀 띠를 이루고 있다. 20여 미터 암릉을 지나 좌측으로 하강하여 땅에 내려선다.

“여기도 낙타바위가 있네.”

엄기준씨가 공터 우측의 낙타등처럼 굽이진 바위날을 보고 손짓한다. 석주길을 오르며 사방에 기암괴석이 많은지라 갖가지 동물을 닮은 바위들이 지천으로 솟아있다.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공터에서 주먹밥과 떡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당시도 여기서 먹었어요.”

석주길과 얽힌 과거의 편린들이 새록새록 떠오른 듯 최미선씨가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15년 전 클럽의 한 선배가 지나쳐 온 슬랩 구간에 확보없이 올라가라는 말에 올라서다 커다란 바위를 움켜잡았는데, 그게 빠지는 바람에 껴안고 5미터를 굴러 가슴팍이 다 멍들었다고 한다. 그 아팠던 기억도 이제 10년 만에 즐거운 추억으로 돌아온 게다. 같은 길을 동시에 올라도 저마다 설악의 느낌은 그렇게 다를 것이다.

애초 2시 희야봉 정상에 서는 것을 계획했던 터인데,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웬만하면 우회하기로 작심하고 암릉 좌측 숲으로 들어선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 침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버티고 서 있다.

“뭣 때문인지 몰라도 한참 헤매다 올라갔어.”

그렇게 말한 채원아씨가 바위에 붙자마자 다시 내뱉는다.

“바위가 살았네 살았어. 손이 다 까졌네. 왜 헤맸는지 알겠다.”

세상이 다시 환해졌다. 울산바위 너머로 동해바다가 넘실거린다. 범봉도 바로 코앞이다. 칼날이 선 듯한 봉우리 우측으로 접어드니 연두색 이끼가 낀 벽 우측으로 갈퀴질을 한 듯한 크랙이 벽면에 나 있다.

“왜 그래, 우회코스 있는데, 정통으로 다 올라가려고?”

최미선씨가 야단이다. 암릉에 난 수많은 길 중 하필이면 가장 어려운 곳만 찾아가는 엄기준씨가 못마땅했나 보다. 마지막 크랙답게 루트는 제법 매섭다. 최미선씨와 채원아씨가 크랙에 재밍한 손등이 까지고 한두 번씩 추락을 거듭하면서도 끝내 혼자 힘으로 올라선다. 그녀들 뒤편으로 지나온 석주길이 칼날처럼 버텨 섰다. 설악골로 떨어지는 협곡 또한 천길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다.

“손등 까지고 난리 났네.”

“영광의 상처예요.”

코앞엔 칼날능선이 희야봉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관문이다. 희야봉 너머로는 작은범봉과 범봉이 쌍지창을 처럼 솟아있다. 거대한 성채를 쌓아올린 듯하다. 살아가기 위해서 첩첩이 넘어서야 할 산처럼 버티고 있다. 우리야 언제나 산을 넘는 사람들이지만 칼날능선 뒤에 곧추선 범봉은 경외마저 들게 한다.

엄기준씨부터 차례로 칼날능선으로 접어든다. 천화대 심장부에 들어선 그는 칼날 위에 서서 범봉을 껴안을 듯이 두 손을 활짝 펼친다. 덩달아 뒤따르던 최미선, 채원아씨도 절벽위에 서서 맘껏 포즈를 취한다. 거대한 벽들과 도열한 침봉들 사이에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어느새 두려움도 사라졌다.

희야봉 정상에 선다. 주변의 찬란한 벽들이 은빛으로 하얗게 다가온다. 다들 천년만년 제 모습을 굳건히 지켜왔을 테다. 거울 앞에 선 여인의 몸단장처럼 계절 앞에 항시 변해보이는 게 산의 모습이겠지만 그 본연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임에도 여전히 늠름하다.



화룡정점의 희야봉 칼날능선

정상에서 좌측으로 내려섰다가 후면으로 돌아가자 하강볼트가 있다. 바로 정면은 작은범봉이 곧장 서 있다. 벌써 4시다. 하강 후엔 흐느적거리며 하산하는 일만 남았다. 서둘러 두 번 하강하여 50여 미터를 내려선다. 하강지점 머리께에 요델산악회에서 세운 석주길 추모 동판이 박혀있다.



메아리 쳐 가는 요델소리와 함께/젊음 사라져간 岳友/엄홍석, 신현주./이 아름다운 설악의 산릉에/한송이 에델바이스로 피어나/영원히 山情 마시며/편안히 영혼의 깃 펴소서.

--이 길을 고 악우의 영전에 드림(요델산악회, 개척:1969.10.7.추모등반)



최미선씨가 하강 도중 묵념을 하고 내려선다. 고 엄홍석, 신현주와 오늘 또 하나의 추억을 선사한 석주길을 그들에게 받쳤던 그들의 절친했던 악우 송준호의 명복을 빌었을 터다. 범봉 안부에 내려서며 “공룡릉은 끝내 구름밖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는 최미선씨의 아쉬움 섞인 음성이 석주길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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